<성현석의 중산층진보 뜯어보기> 죽창 대 기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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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우금티(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은 어떤 무기를 썼나. 죽창을 든 동학 농민군을 일본군이 기관총으로 쓸어버리는 모습을 흔히 떠올린다. ‘죽창 대 기관총’이라는 대조가 워낙 강렬하다. 동학을 소재로 한 글이나 공연에서도 자주 쓰인 이미지다. <위키피디아>에도 일본군이 미국제 개틀링 기관총을 갖고 있었다고 돼 있다. 언론 기사 및 칼럼에도 자주 소개됐다.

그런데 한 세미나에서 우금티 전투에서 일본군이 기관총을 쓰지 않았다는 주장을 접했다. 다른 연구자도 같은 의견이었다. 우금티 전투에서 포를 쐈다는 기록, 앞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을 당시 기관총을 노획한 사실 등이 있지만, 우금티 전투에서 기관총이 쓰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일본군의 기관총 사용 여부와 관계없이, 전투 당시 지형과 전술만으로도 동학 농민군의 패배를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왜 ‘죽창 대 기관총’이라는 구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였을까. 각성한 평민들이 세상을 바꾸고자 들고 일어났다. 이런 거대한 서사가 허무하게 끝난 이유를 너무 단순하게 설명하려는 집단 무의식이 작동했던 것 아닐까. 동학 농민군의 한계에는 눈 감고, 기관총이 상징하는 과학기술 역량에서만 원인을 찾으려 한 것 아닐까.

 

기관총 없어서 망했다? 기관총만 있으면 다 해결된다?

이는 다른 편향으로 이어진다. 동학 농민군이 기관총을 갖고 있었다면, 역사가 달라졌으리라고 믿는다. 가능성은 낮다. 일본 등 외세의 개입은 구조적인 조건이었다.

민중운동가 백기완은 “우리 역사는 감격을 학살당했다”라고 말했었다. 우금티 전투를 예로 들었다. 1980년대 민중사관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대체로 공감하는 정서다.

부작용도 있다. 자주적인 근대화를 하지 못했다는 콤플렉스, 근현대사의 상처 때문이다. ‘죽창 대 기관총’의 이미지가 콤플렉스와 결합하면, 기술 혁신에 대해 성찰하는 힘이 사라진다. 기관총이 없어서 망했다는 생각은, 기관총만 있으면 다 해결된다는 생각과 닿아 있다. 기관총이 상징하는 것들을 물신화한다. 망해서 생긴 상처와 콤플렉스가 깊은 상태에서, 기관총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는 이가 나타나면, 맹렬한 반응이 나온다. 과학 사기꾼 황우석이 그런 사람이었다.

최근 ‘타다’ 논쟁도 비슷하다. 어차피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흔히 말한다. 그러니까 한시바삐 올라타야 한다고 한다. 꼭 그렇지는 않다. 숱한 신기술이 그냥 사라졌다. 공항 같은 곳에서 가끔 보는 ‘세그웨이’. 혁신의 아이콘으로 통하는 스티브 잡스가 “개인용 컴퓨터(PC)의 탄생”에 빗대며 극찬했던 발명품이다. “인터넷보다 혁명적이다”라는 평가도 나왔었다. 2019년 지금까지도 세그웨이 때문에 일어난 혁명은 없다. 세그웨이는 2015년 중국 회사에 인수됐다.

새로운 기술이란, 잘 따져보고 조건에 맞춰 활용할 대상이다. 무조건 배척하기, 무작정 받아들이기, 모두 잘못이다.

 

86세대와 ‘학살당한 감격’

‘학살당한 감격’을 상처로 품고 살면, 비슷한 오류를 반복하기 쉽다. 우금티에서 몰살당하던 순간에 생각이 사로잡힌 탓에, 모든 게 너무 급하다. 기관총이 나타났다 싶으면, 무조건 도망치거나 투항해야 한다. 아니면 ‘궁궁을을’ 부적을 붙이고 돌진해서 죽는다. 이런 세 가지가 아닌 다른 선택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

지금도 비슷하다. 낯설지만 강력한 혁신 시도가 나올 때마다 보는 풍경이다. 기술 혁신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니까, 그 때문에 피해 보는 이들은 무조건 투항해야 한다고 한다. 아니면 그냥 외면하고 살자고 한다. 다른 길도 분명히 있을 텐데, 너무 쉽게 찾기를 포기한다. 기술 변화를 직시하되, 혁신으로 피해 입는 이들더러 그저 항복하거나 총 맞아 죽기를 요구하지 않는 길 말이다.

광주 학살 이후 목숨을 걸고 독재에 맞섰던 ‘86세대’가 이제 50대다. <강철서신>을 쓴 김영환,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 등이 1982년에 대학에 들어갔다. 그 또래 나이가 대략 만 56세다. 베이비붐 세대로 자라면서, 혹독한 입시경쟁을 치렀다. 대학 진학률은 30퍼센트 안쪽이었다. 입시경쟁의 승자가 품은 보상 심리는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것까지 성찰할 겨를은 없었다. 민주화 운동을 한 이들은 수배와 고문을 겪었다. 윗세대와 마찬가지로, 연고주의 문화가 강하다.

경제성장의 혜택을 크게 누렸고, 지금 청년세대가 겪는 취업난은 경험하지 못했다. 20대 중반에 6월 항쟁을 겪었다. 승리의 감격과 대선 패배의 충격을 함께 겪었다. 그들의 믿음이 구체적인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는 점을, 이후 긴 시간을 통해 확인했다. 그들의 감격 역시 부러지고 녹이 슬었다. 우금티 전투에서 몰살당한 농민군, ‘학살당한 감격’의 서사에 대한 열광에는 이유가 있어 보인다.

아울러 대세 앞에서 조급해지는 경향 역시 그들의 경험과 관련 있어 보인다. 국가 권력과 맞물린 명확한 구호. 그에 대한 지지와 반대, 그 바깥을 이야기한 경험이 적다. 그러니까 대세를 따른다와 아니다 이외의 선택에 대해선 상상력이 제한된다.

 

 

 

<사진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http://www.610.or.kr/)
<사진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http://www.610.or.kr/)

 

‘자주, 민주, 통일’ 이후

86세대는 한국 현대사에 중요한 획을 그었다. 그건 명백하다. 필자는 1974년에 태어나 1993년에 대학에 들어갔다. 오래 전에 한 친구가 “1970년대는 1980년의 전사(前史)로, 1990년대는 1980년대의 타락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 같다”고 이야기했었다. 그 기억이 오래 남았다. 1990년대가 1980년대의 타락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후대 역사가들이 86세대를 중심으로 역사를 기록하리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86세대’ 운동권 다수파의 이념은 1990년대 이후로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자주, 민주, 통일’이다. 지금도 국민 다수가 공감한다. 1990년대 이후 여성, 생태 등을 아우르는 새로운 진보 이념이 부상했다. 그러나 정치와 언론의 주류 담론은 아니다. 반면, ‘자주, 민주, 통일’은 표현만 바뀌었을 뿐, 한국 정치의 핵심 의제다.

이들 과제는 진도가 꽤 나간 상태다. ‘자주’ 구호의 핵심 과제인 전시작전권 전환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었다. 이를 위한 기초 작업이 진행 중이다. 한국이 독자적으로 전시작전권을 행사할 수 있다면, 과거 ‘자주’ 구호가 필요했던 이유는 꽤 해소된다. 국민 다수가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리거나, 갑작스런 쿠데타를 겪을 가능성은 거의 사라진다.

민주와 통일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극우 세력은 소수파다. 통일까지는 아니어도, 남북관계 개선을 향한 노력 역시 진행 중이다. 어차피 ‘통일’ 구호를 외칠 당시에도, 다수가 내심 원한 것은 통일 그 자체라기보다 평화, 그리고 레드 콤플렉스 해소였을 게다.

문제는 그래서 생긴다. ‘자주, 민주, 통일’이 진척된 뒤엔 무엇을 해야 하나. 이들 과제는 이미 정부의 핵심 과제이므로, 정치권 밖에선 할 일이 많지 않다. 현 정부에 있는 86세대 정치인이 이들 과제를 더 힘차게 추진하도록 표를 모아주는 것, 혹은 극우세력을 압박하는 것. ‘자주, 민주, 통일’을 중심에 두면, 보통 시민이 할 일은 그뿐이다.

‘자주, 민주, 통일’ 이후를 고민하는 이들은 86세대 정치인, 혹은 그들의 지지자들과 거리가 생긴다. 86세대 정치인의 한계를 지적하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자주, 민주, 통일’을 중심에 둔 이들이 보기엔, 모두 ‘뒤에서 총 쏘는 자들’이다. 작은 허물은 덮고 힘을 합쳐야 할 상황에서 엉뚱한 이야기를 하거나 대오를 흔드는 자들로 여겨진다.

‘자주, 민주, 통일’은 이미 한국 정치의 ‘대세’다. ‘대세’에 올라탄 이들은, ‘대세’ 바깥의 중요한 문제들을 살필 여유가 없다. 이는 구조적인 문제다.

 

공적 관심사는 없고, 사적 영역에선 ‘각자도생’

‘자주, 민주, 통일’ 바깥의 시대정신도 분명히 있다. ‘자주, 민주, 통일’의 진도가 빨라질수록 나머지 영역이 중요해진다. ‘자주, 민주, 통일’은 국가권력과 맞물린 과제인데, 국가권력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 역시 점점 중요해진다. ‘자주, 민주, 통일’에만 눈길이 쏠리면, 이런 문제를 놓친다. 만약 외국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새로운 유형의 극우 포퓰리즘 세력이 한국에서도 나타나, 정부 밖 시민사회에 뿌리를 내린다면, 한국 민주주의는 새로운 위협을 맞을 것이다.

아울러 86세대가 은퇴를 앞두고 있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들이 하겠다고 한 과제가 ‘자주, 민주, 통일’이었는데, 이미 진도가 꽤 나간 탓에 정치권 밖 시민이 할 일은 별로 없다. 그런데 정규직 직장에서 물러나면 어떻게 되나. 공적 관심사는 사라졌는데, 사적 영역에선 ‘각자도생’ 논리에 휘둘린다. 청년 시절, ‘자주, 민주, 통일’ 구호를 함께 외쳤던 그들은 갈라서게 된다. 노후 준비가 된 쪽과 아닌 쪽. 건물주나 자산가가 돼 지대 수입으로 사는 쪽과 치킨 집을 열거나 불안정 노동을 전전해야 하는 쪽.

86세대가 한국 현대사에서 담당했던 역할이 큰 만큼, 그들의 은퇴 이후 생겨날 공백 역시 크다. 그리고 86세대 이후, ‘자주, 민주, 통일’ 이후에 대한 논의는 없다시피 하다.

 

86세대 경험과 중산층 확대

이 연재의 목적은 ‘중산층’ 개념으로 진보 성향 86세대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살피는 것이다.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들의 삶은 한국 ‘중산층’의 성장과 같은 궤적을 그린다. 대학 입시 성공을 통한 중산층 진입, 고시 합격이나 사업 성공을 통한 상류층 진입 사례가 활발히 나온 것도 이 세대다. 이재명 경기 지사는 소년공 출신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변호사가 됐다. 이재명 지사가 1964년생이다. 그가 1950년생, 혹은 1980년생이라면, 어떤 모습일까. 가족의 배경이 같다면 말이다. 지금처럼 성공하기는 어려웠을 게다.

86세대가 경험한 역사적 감동 역시 ‘중산층’의 성장과 맞물려 있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군사정부가 한발 물러선 배경에는 ‘넥타이 부대’의 시위 참여가 있었다. 꾸준히 성장한 중산층이 군사정부에 등을 돌리자, 폭압 통치는 작동하기 힘들어졌다. 폭압 통치의 부역자들 역시 중산층 커뮤니티의 구성원이었다. 그들의 자녀들은 대학생이었다. 자녀의 친구들은 죄다 독재자를 욕했다. 성당이나 교회에서, 학부모 모임에서 그들이 소외된다면, 독재자의 손발이 둔해지는 건 필연이다. 오래 버티기 힘들다.

86세대의 감동이 부러진 배경에도 중산층의 성장이 있다. 19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 대기업 생산직 소득이 크게 늘었다. 대학에 가지 않아도 중산층이 되는 길이 열렸다. 하지만 86세대가 외쳤던 구호와는 멀어졌다. ‘노동해방’이 대기업 노동자만 잘 사는 세상을 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에서 우금티 전투에서 몰살당한 동학 농민군 이야기를 했다. 1987년 6월 항쟁을 겪은 86세대와 비교하게 된다. 86세대가 거둔 일정한 승리는 경제성장과 맞물린 중산층 확대와 관련이 있었다. 동학 농민군은 갖추지 못한 조건이었다. 기존 체제 기득권 세력과 농민군 사이에 있으면서, 동학 세력의 요구에 부분적으로나마 공감하는 세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일본군에게 기관총이 있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동학 농민군의 염원은 좌절됐을 것이다.

86세대에게 익숙한 서사에는 이 대목이 비어 있다. “우금치 마루에 흐르던 소리 없는 통곡”(‘이 산하에’), “흙 묻은 팔뚝엔 불거진 핏줄 황토벌판에 모여선 그날”(‘동학농민가’)을 노래하곤 했다. 그러나 이런 정서는 86세대가 청년 시기를 보내던 당시의 경제적 토대와도 맞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중산층 자제였으며, 흙수저 출신이어도 곧 중산층이 될 상황이었다. 이런 처지와 정서 사이의 간극. 1987년 이후 86세대의 모습은, 그 전에 어느 정도 그려진 것이었을 수 있다. 이 연재 초반부는 영화, 소설, 노래 속 묘사를 인용해서 이런 문제를 살필 예정이다. 다음 글에선 86세대 작가인 김영하의 <빛의 제국>에 비친 86세대 중산층을 들여다보겠다.

 

성현석 / <프레시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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