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빈의 옆줄> 2차 산업혁명과 어제의 산업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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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차례에 걸쳐서 출산율에 관한 몇 가지 생각의 지점들을 검토해 보았습니다. 이제 역사적인 추세를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산업혁명 이후로 인구가 급증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 현상이 출산율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제 추측이지만, 여기에는 토머스 맬서스의 유명한 저서 [인구론]이 끼친 (악)영향이 상당한 원인일 것입니다. [인구론]을 읽으신 분들은 인간을 “식욕과 성욕밖에 없는, 그래서 밥 많이 먹고 힘이 남아돌면 밤새도록 새끼나 한없이 만들어 까놓는 짐승들”로 보는 그의 인간관에 경악하셨을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인간에 대한 모독”이라고 분노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물질적 풍요를 곧바로 출산율 증가로 연결짓는 사람들의 (기괴한) 통념이 만들어지는 데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이 맬서스였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경제가 잘 나가면 출산율이 늘어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며, 그렇지 않은 경우는 무언가 사회가 잘못되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사실 19세기 이전과 이후의 전 세계 인구 증감의 추세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래의 시계열을 보면 그 정반대가 사실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산업혁명이 가장 먼저 시작된 두 나라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산업사회의 도래가 출산율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가장 장기적인 데이터를 보여줄 수 있는 나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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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통념과 달리 산업혁명으로 진입한 나라들에서는 그 이후로 일관되게 출산률이 감소해 왔습니다. “배불리 먹고 힘만 남아돌면 한없이 애를 까놓는 게 인간”이라는 맬서스의 “자연 법칙”을 보기 좋게 반박하고 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에 나타나는 인구의 급증은 영양 상태와 생활 조건 및 보건 의료의 개선 등에 힘입은 사망률의 급격한 감소에 있었던 것이지 빈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새끼를 까놓았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산업혁명의 “자연적” (그런 게 있다면) 장기적 추세는 출산률 감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산업사회로 진입한 사회의 인구 추세를 다음과 같이 유형화한 그림도 있습니다. 산업혁명이 벌어지면 먼저 사망률이 급속히 떨어지고 어느 정도의 시차를 두고 출산률이 급속히 떨어집니다. 이에 총 인구는 급격하게 늘다가 체감을 보이게 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5단계까지 가게 되면 인구대체율 이하로 출산률이 떨어지면서 인구가 감소하는 일까지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근 들어 인구의 자연 증가율이 급감하고 있어 이러한 상태에 온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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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영국과 프랑스 합계 출산률 시계열에서 오히려 눈여겨 보아야 할 지점은 장기적인 감소 추세가 증가로 돌아섰던 기간, 즉 20세기 초중반에서 1960년대 말까지의 기간입니다. 저는 이 기간에 나타난 반전이 2차 산업혁명과 그로 인해 생겨난 이른바 “산업사회”의 도래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된 19세기 말의 영국의 문화를 볼 때, 하층 계급 여성들에게 여전히 출산이란 쉽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낳고자 하는 대로 원없이 낳을 수 있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경제적 부유층들의 특권이었습니다. 하층 계급 여성들은 자식을 낳아 기를 수 있는 유무형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어린 나이부터 하녀일을 위시한 온갖 궂은 일들을 해나가야 했으며, 그녀들에게 있어서는 여기에 일정 정도 성공을 거두어야만 낳을 수 있는 것이 자식이었기에 자식은 일종의 인생의 성취로 여겨졌습니다. 한 연구에 의하면 20세기 초엽까지만 해도 영국에서 일생 아이를 낳지 않은 여성의 비율은 20퍼센트가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연구에 따르면 이 숫자가 1950년대가 되면 5퍼센트까지 떨어집니다. 방금 우리가 주목한 저 차트의 추세 역전 부분이 이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지나친 단순화를 무릅쓰고 거칠게 말하자면, 2차 산업혁명이 완숙기에 접어들면서 20 세기 중반에 나타난 새로운 산업 사회 – 굴뚝 산업 대공장 시스템, 포드주의, 대량생산/대량소비, “산업사회” 등의 용어들과 결부된 – 는 남성 혼자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도록 임금과 소득의 수준이 지켜지고, 이에 따라 여성은 집안에 머물면서 육아와 가사에 전념한다는 틀에 박힌 가정의 모습을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정이 성립하기 위한 몇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첫째, 노사관계와 산업관계가 안정되어 있고 철저하게 규제되어 있어서 노동 계급 남성에게도 일생에 걸친 고용의 안정이 보장된다. 둘째, 결혼 후에 나이가 들면서 가족 인원 수가 늘어나고 또 교육비도 늘어나게 되어 있지만 이를 충당할 수 있도록 실질 임금이 장기적으로 계속 오른다. 셋째, 인생 주기의 안정성을 보장할 수 있도록 시장 임금 이외에도 주택, 교육, 의료 등 여러 분야에서 하층 계급의 생계를 돕는 튼튼한 복지 시스템이 존재한다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바, 1950년대 미국 흑백 TV에서 그려졌던 “홈 스위트 홈”의 이미지는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모든 남성 노동자들이 자기의 주택/가족을 소유하고 거느리는 “부르주아”가 된 상태에서, 가족은 18세기 부르주아들이 이상으로 삼았던 형태의 핵가족이 되며, 여성의 위치 또한 그 속에서 애 낳고 기르는 것을 일생의 업으로 삼는 존재로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해서 “베이비 붐”을 이루며 아이들이 태어나면 이는 인구 증가와 노동력 공급 확대로 연결되며, 이는 잠재성장률의 증가로 이어집니다. 이는 다시 자본의 투자 증가와 이를 통한 생산 및 소비의 확대로, 그를 통한 자본 축적과 국민소득의 증가 및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는 등의 선순환 구조를 만듭니다. 이것이 지금은 아득한 추억이 되어 버린 20세기의 “산업사회”의 이미지였습니다.

첨언하자면, 이러한 이미지의 가정과 여성의 성 역할 등은 서구보다 오히려 일본과 한국에서 더욱 철저하게 실현된 감이 있습니다. 80년대 이전의 일본의 경제성장 신화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익숙한 이야기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이샤인 会社員”인 남편은 새벽에 출근하여 잦은 야근에 회식까지 겹쳐 술로 떡이 되어 또 새벽에 들어오고 주말이 되면 잠만 잔다. 엄마는 그렇게 봉급을 벌어오는 것 말고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는 남편의 모든 수발을 다 들어줄 뿐만 아니라 집을 챙기고 아이들을 낳고 예쁘게 엇나가지 않게 키우는 모든 역할을 다한다. 그 결과 엄마들은 남편이든 아이들이든 무슨 욕구든 다 채워주는 “냉장고 엄마”가 되고 그러다가 남편이 나이 들어 회사에서 퇴직하면 황혼 이혼을 요구한다 – 이는 사실 한국인들에게도 그다지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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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야기는 이제 아득한 옛 추억이 된 감이 있습니다 –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물론 오늘날에도 중상류층 이상의 사람들은 이러한 삶을 “정상적” 가정으로 여기고 추구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를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 특히 아래 절반 이하의 “성 밖” 사람들에게는 사실상 멀고 먼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앞에서 20세기 초엽 영국 하층 계급 여성들의 출산율에 대해 언급하면서 나왔던 연구 또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1세기가 되어 노동의 안정성도 장기적인 실질 임금의 상승도 탄탄한 사회 복지 시스템도 사라지면서 20세기의 “산업사회”가 사라진 오늘날,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들의 비율은 다시 20퍼센트를 넘고 있다고. 결국 20세기의 우리는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셈입니다. 비록 20세기 중반에 얼마간의 반전이 있었지만, 산업 혁명 이후의 인류에게 나타난 “자연적” 현상인 출산율 감소는 다시 힘차게 작동하기 시작한 셈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20세기에 나타났던 2차 산업혁명의 “산업사회”의 추억은 그렇게 망각으로 보낼 일이 아닙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이 시대를 지난 인류의 집단적 경험이 “정상적” 산업사회와 그 속에서의 “정상적” 삶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거의 결정하다시피 해놓았기 때문입니다. 경제학과 사회과학 전반을 거쳐 국가의 제반 정책의 설계와 착상에서도 하나의 “정상적 규범norm”으로 작용하는 사회상이 바로 이것입니다. 경제 성장, 징병 가능 인구, 교육 및 각종 사회 인프라의 공급, 세수, 사회 복지 지출, 연기금 등 각종 사회 보험의 장기 추계 등등은 모두 경제성장률과 인구 증가율에 대한 일정한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제는 “정상적으로” 결혼하고 출산하는 이들이 다수를 차지하여 인구는 (혹은 인구 증가율은) 어느 정도 이상으로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인류가 산업 혁명 이후의 인간 사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 조사를 시작한 것은 불과 100년도 되지 않습니다만, 하필이면 그 때가 바로 위와 같이 출산율이 장기적 추세와 다른 때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산업 사회의 미래상에 대해 생각할 때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통념을 아주 근본적으로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의 이유는 규범적인 것입니다. 3차 아니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는 오늘날 20세기 중반의 “산업사회”를 되돌리는 것은 물론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사회는 철저히 속속들이 나쁜 사회였을까요? 출산율이 다시 19세기 말의 추세를 이어가는 현재의 모습은 바람직한 것일까요? 그렇게 말할 일이 아닙니다. 양쪽 모두 인간들 스스로가 살아가면서 스스로가 만들어낸 세상입니다. 어느 쪽에나 소중히 해야 할 가치는 있습니다. 여성의 자유와 인생 주기의 다양함도 소중합니다. 직장과 소득의 안정성과 그를 통한 장기적인 인생 계획의 가능성도 소중합니다. 헤밍웨이나 사르트르처럼 살아가는 삶도 있지만 아이 많이 낳아 예쁘게 기르고 화목하게 웃으며 사는 것을 더 원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훨씬 더 많습니다. 이런 질문들은 설령 예수님 부처님이라고 해도 감히 일률적으로 답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여러 긍정적인 것들을 최대한으로 취하면서도 가급적 많은 사람들에게 최대한의 선택을 허용하는 사회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게 우리의 질문이라면, 이 20세기의 경험은 곰곰이 살펴보고 또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산업 혁명 이후로 인류는 미궁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정해진 답도, 정해진 질문도 없습니다. 질문도 답도 모두 우리가 만들어가야 합니다. 출산율의 문제는 그 수많은 질문들 중 아주 작은 하나일 뿐입니다.

홍기빈 /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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