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준의 그람시를 다시 읽자] 연재를 시작하며

우리에게 ‘역사적 블록’이라는 틀을 통해 대안 주체를 형성할 길을 찾아 헤매던 한 세기 전 이탈리아인, 안토니오 그람시는 더없이 소중한 대화 상대다. 이런 이유로 나는 2020년대를 앞두고 그람시를 다시 읽는 일이 곧 한국 사회를 읽는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길 가운데 하나가 되리라 믿는다.
안토니오 그람시를 다시 읽자오늘날 그를 다시 읽음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1990년대 한국 사회에서 그람시는 무엇보다 ‘시민사회’의 사상가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노동계급 운동 대신 이제는 시민사회 운동에 주력해야 한다는 이들 사이에서 주로 회자됐다. 또 어떤 이들은 그를 20세기 말에 유행을 탄 ‘문화’이론의 흐름 속에서 해석했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은 프랑스 현대 사상가들의 난해한 어휘들로 나아가는 관문 격으로 취급됐다.

물론 누구나 ‘자신의’ 그람시를 이야기할 자격이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람시의 본령은 간과되거나 무시된 것만 같다. 정작 그람시가 자기 삶을 바쳐 물고 늘어졌던 물음과 해답의 실마리는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게 아닌가. 2000년대 벽두에 그람시의 젊은 시절 논설들을 서툰 솜씨로 옮겨 묶어낸(김현우와 공역,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이전』, 갈무리, 2001) 이유도 다름 아니라 이런 의혹 때문이었다. 투옥되기 전에 쓴 글들과 『옥중수고』를 이어서 독해할수록, 특히 『옥중수고』의 서문이나 마찬가지인 「남부 문제의 몇 가지 측면」을 곱씹어 읽을수록 이 의혹은 확신이 되었다.

남부 사르데냐 출신이면서 북부 공업 도시 토리노의 생활을 통해 사회주의자가 된 그람시의 머릿속을 한평생 떠나지 않은 것은 이탈리아의 복잡한 국민국가 형성-자본주의 발전 과정이었다. 이 복합성과 역동성을 해명하기 위해 동원된 게 ‘시민사회’니, ‘헤게모니’니, ‘유기적 지식인’이니, ‘수동혁명’이니 하는 『옥중수고』의 개념들이다. 그런데 이들 개념 실험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결국은 당대 이탈리아 사회관계들의 응집된 형상을 포착하려는 ‘역사적 블록’이라는 틀을 완성하기 위한 구성 요소들이다. 그람시는 이렇게 하여 작성한 지도에서 노동자, 농민이 사회 전체를 새롭게 재구성할 ‘지적-도덕적’ 주체로 성장할 길을 찾고자 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20대 초에 대학을 그만두고 사회당 토리노 지부 기관지에 처음 발표한 글들부터 만년의 『옥중수고』에 이르기까지 일관하는 필생의 화두다.

이러한 그람시의 화두는 지금 한국 사회의 고민과 거리가 멀지 않다. 한국은 이탈리아만큼이나 복잡한, 아니 훨씬 더 복잡한 근대사를 겪어왔다. 그람시에게 자본-노동 모순과 북부 이탈리아-남부 이탈리아 모순의 얽힘이 고민거리였다면, 우리에게는 민주주의의 진전과 자본주의의 장기 지속에 따라 덧붙여진 성별 모순과 산업 문명-지구 생태계 모순이 있고, 또한 분단에 따른 모순이 있으며 지역 간 모순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정규직/대기업-비정규직/중소기업으로 나타나는 노동 내부의 심각한 모순이 있다. 그렇기에 붕괴 일로의 후기 자본주의를 대신해 사회를 재건할 ‘지적-도덕적’ 주체를 식별하고 육성하기가 100년 전 이탈리아보다 더 난감하게 느껴진다.

이런 우리에게 ‘역사적 블록’이라는 틀을 통해 대안 주체를 형성할 길을 찾아 헤매던 한 세기 전 이탈리아인, 안토니오 그람시는 더없이 소중한 대화 상대다. 이런 이유로 나는 2020년대를 앞두고 그람시를 다시 읽는 일이 곧 한국 사회를 읽는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길 가운데 하나가 되리라 믿는다.

나는 이런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그의 글들을 추리고 다시 옮기며 읽어 내려갈 계획이다. 우선 감옥에 갇히기 전에 신문, 잡지에 발표한 글들을 25편 가량 선정해 소개하려 한다. 그중에는 2001년에 낸 선집에 이미 포함된 글들도 있고 이번에 처음 국역하는 글들도 있다. 선집에 실렸던 글들도 이번에 완전히 새로 번역해 정확성과 가독성을 높이려 한다. 이 글들 중 가장 마지막에 실릴 「남부 문제의 몇 가지 측면」과 「리옹 테제」는 『옥중수고』로 나아가는 징검다리가 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옥중수고』 가운데 핵심이 되는 몇 장을 선정해 새로 옮기고 다시 해석하려 한다. 지금 생각하기로는 『옥중수고』 선집에서 각각 “지식인”, “이탈리아 역사에 대한 수고”, “현대의 군주”,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제목으로 모아 놓은 단편들을 우선적으로 다루려 한다.다만 안타까운 것은 내가 이탈리아어를 전혀 모른다는 점이다. 20여 년 전에 공역한 선집도 그래서 영역본을 중역한 결과물이었다. 이번에도 나는 아래 영역본을 바탕으로 작업하지 않을 수 없다.

- Selections from Political Writings 1910-1920, Quintin Hoare(ed.), John Matthews(trans.), Lawrence & Wishart, 1977.
– Selections from Political Writings 1921-1926, Quintin Hoare(ed. and trans.), Lawrence & Wishart, 1978.
– Pre-Prison Writings, Richard Bellamy(ed.), Virginia Cox(tra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 History, Philosophy and Culture in the Young Gramsci, Pierlugi Molajoni et al.(trans.), Telos Press, 1975.
–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 Quintin Hoare and Geoffrey Nowell Smith(eds. and trans.), Lawrence & Wishart, 1971.
– Further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 Derek Boothman(ed. and tran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5.
– Prison Notebooks Vol. Ⅰ-Ⅲ, Joseph A. Buttigieg(ed. and trans.),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2.국내에 이미 이탈리아 원문을 번역한 책들(대표적으로, 『남부 문제에 대한 몇 가지 주제들 외』, 김종법 옮김, 책세상, 2004)이 나오기 시작한 상황에서 영역본 중역은 좀 궁색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의미를 찾는다면, 일단 시중에 유통되는 국역본이 대개 너무 오래 전 번역이라는 점을 들겠다. 중역이라는 한계에 더해 가독성이 떨어진다. 그리고 더 적극적인 의미를 이야기한다면, 이번 작업의 핵심은 번역 자체보다도 ‘주해’ 쪽에 있다.

주해라는 형식은 주로 한문 고전의 당대적 독해에서 자주 접할 수 있다. 훌륭한 한문 고전 번역서는 한문 원문을 현대어로 옮길 뿐만 아니라 역자 해설이나 견해가 원문보다 훨씬 길게 따라 붙는다. 때로는 이게 옛 사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답답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잘 쓰인 주해는 오히려 지난 사유-실천의 자취와 현대인의 상황을 대면시킴으로써 고전의 문구 해석을 넘어서는 새로운 출구를 열어 보이기도 한다. 감히 이 정도 경지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나는 그람시 원문 번역에 우리 시대의 고뇌를 담은 해설을 달아 단순 번역 이상의 텍스트를 만들어보려 한다.

말하자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독자들과 함께 그람시를 통해 한국 사회를 읽는 것이다.

장석준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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