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의 늪에서 탈출하기, “개천에서 용 안 난다!”

 
지금 한숨이 나오는 이유는, 이겨야 마땅한 선거에서 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활로 또한 보이지 않기 때문이겠죠. 2013년 이래 매년 진 선거의 패배 원인은 언제나 똑같은데, 그렇다면 답을 안다 해도 표로 연결할 능력이 없다는 말이니까요.

 

불평등과 상향 이동성 : 가난한 사람들은 왜 보수를 지지할까?

그런 수수께끼 같은 일 중 하나가 분배는 악화되는데, 그것도 최상위만 더욱 더 부자가 되는데 ‘가난해진 대다수가 재분배나 분배를 통한 성장(최근의 이론으로는 ‘소득 주도 성장’)을 주장하는 정당을 지지하지 않느냐’일 겁니다.

분단 체제나 인구 구조, 언론의 편향 등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이나 진보 성향 정당에 대한 불신 등이 패배의 일반적 원인이라면, 사회 이동성에 대한 믿음은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핵심 열쇠 중 하나입니다.

즉, 지금 내 사회 경제적 지위가 하락한다 해도 앞으로 내 아이들의 지위는 상승할 거라고 믿는다면 현재의 정책 기조를 지지할 수 있겠죠(물론 이에 더해서 진보 성향의 정당이 잡아도 별로 달라질 게 없다고 믿는다면 정책 이외의 다른 관성에 따라 투표하겠죠).

예컨대 다음의 자료가 그렇습니다.

▲ [그림 1] 재분배와 상향 이동성. 독일 하노버 대학의 카리나 엥겔하르트(Carina Engelhardt)와 안드레아스 바거너(Andreas Wagener)가 2014년에 발표한 논문(‘Biased Perceptions of Income Inequality and Redistribution’)에 실린 내용입니다. ⓒ프레시안

▲ 실제 상향 이동성과 인지 상향 이동성. ⓒ프레시안

[그림 1]의 왼쪽은 한국의 사회 지출이 최하위 수준이고 상향 이동성도 대단히 낮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오른쪽 그림은 한국인의 ‘인지 상향 이동성’은 최상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여 한국은 실제 상향 이동성과 인지 상향 이동성의 격차가 가장 큰 나라가 되었습니다([그림 2]).

실제 상향이동성은 낮은데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겁니다. 이런 사고를 하고 있다면 불평등이 점점 더 심해진다 하더라도 내가 최상위에 속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오히려 그 상황을 지지할 수도 있다는 거죠.

이런 나라에서 존 롤스의 정의론은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무지의 장막’ 뒤에서 선택하는 사회는 정의롭다”는 통찰, 또는 가설이 롤스 정의론의 핵심이니까요. 즉 우리가 부자로 태어날지, 가난한 자로 태어날지 또 남성과 여성 어느 쪽일지, 서울과 지방 어디에서 태어날지 모르는 상태(‘무지의 장막’)에서 모르는 상태에서 내가 살아갈 사회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쪽을 택할까요?

아마도 대부분은 최악의 상태로 태어난다 하더라도 ‘괜찮은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택할 거라는 게 롤스의 생각입니다. 즉 정의로운 사회는 평등하고 또 사회적 이동이 보장되어 있는 있을 거라는 얘깁니다. 하지만 자신이 가장 유리하게 태어나거나 최상위 지위를 올라갈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면 우리는 불평등한 사회를 선택할지도 모릅니다. 위 그림은 우리가 그런 상태에 있다는 걸 보여 줍니다.

실제 상향 이동성은?

물론 희망 사항과 객관적인 판단은 다를 수 있습니다. 또 ‘나와 내 아이의 노력만으로 상향 이동할 수 있다’는 것과 ‘나와 내 아이의 능력이 출중해서, 나와 내 아이는 운이 좋으니까 상향 이동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다릅니다. 과연 어느 쪽일까요?

최근 발표된 한국개발연구원(KDI) 김희삼 연구위원의 보고서 <사회 이동성 복원을 위한 교육 정책의 방향>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 일부를 찾을 수 있습니다. (☞관련 자료)

우선 보고서는, 통계청 사회 조사에 나오는 질문인 “우리 사회에서 현재의 본인 세대에 비해 다음 세대인 자녀 세대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에 대한 응답의 추이를 살펴봅니다.

‘비교적 낮다’와 ‘매우 낮다’를 합한 부정적 응답의 비율을 보면 1994년 5.1%, 1999년 11.2%, 2003년 19.8%, 2006년 29%, 2009년 30.8%, 2011년 42.9%, 2013년 43.7%로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즉 한국 사회에서도 인지 상향 이동성이 낮아지고 있는 거죠(엥겔하르트와 바거너의 논문은 1987, 1992, 1999, 2006~2009년 통계의 평균을 사용했기 때문에 과거의 낙관이 반영되어 있는 겁니다).

또 KDI의 2013년 ‘행복 연구’의 “성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운이나 연줄보다 노력이다”라는 질문에 대한 긍정적 응답은 60대가 75.5%인 데 비해 20대는 51.2%로 나타났습니다. 즉 한국에서도 인지 상향 이동성은 점점 낮아지고 있으며 또한 젊을수록 운이나 연줄이 아니면 상향 이동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실로 이런 인식은 우리의 객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해방 후 농지 개혁과 한국 전쟁으로 인해 한국은 자산과 소득 양면에서 가장 평등한 나라였습니다. 출발선이 비슷했기 때문에 교육은 상향 이동의 통로였고 고성장 시대의 고용 증가는 사회 경제적 지위도 평등하게 만들었죠.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 이래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불평등한 나라가 되고 있습니다(이 란에서 틈틈이 소개해 드린 ‘생산성과 실질 임금의 비교’, ‘지니계수’, ‘피케티지수’, 어느 지표로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전반적으로 인지 사회적 이동성도 떨어지고 고도성장과 평등의 경험이 없는 젊은 세대일수록 노력에 의한 성공 가능성(즉 ‘메리토크라시’)을 믿지 않게 되는 거죠.

상향 이동의 통로에서 벽이 된 교육

이 보고서는 교육에 관한 일반인들의 느낌을 수치로 보여줍니다.

▲ [그림 3] 서울 출신 서울대 입학생 구성 변화. ⓒ김희삼

세간의 짐작처럼 서울대 입학생 중 서울 출신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고 서울 출신 중에서도 특목고와 강남 3구의 비율은 무려 62.5%에 달합니다([그림 3]). 이런 사실은 사교육이 대학입시에서 상당한 역할을 한다는 세간의 믿음(“할아버지의 재산,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을 방증하고 있는 거겠죠.

부모의 자산과 소득이 어느 대학교를 가느냐를 결정하고, 그것이 다시 직업 등 사회적 지위를 결정한다는 일반적인 인식은 아직 출간되지 않은 김희삼 연구위원의 다른 보고서(<세대 간 계층 이동과 교육의 역할>)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관련 기사 : 부모 재력=자녀 학벌 ‘성공 사다리’ 끊긴 한국)

이 보고서를 인용한 기사에 따르면 “아버지와 아들 356쌍(평균 출생 연도 아버지 1946년, 아들 1976년)의 월평균 임금 분포(아버지는 1998~2012년, 아들은 2008~2012년 평균 임금)를 최하위·하위·상위·최상위 4개 구간으로 나눠 분석해보니 최하위 25% 임금을 받는 아버지로부터 최상위 25% 임금을 받는 아들이 나올 비율은 18%에 그쳤다”는 겁니다.

보고서는 이른바 명문 대학에 “고액 사교육의 도움을 많이 받아온 고소득층 자녀가 주로 입학하게 된다면 잠재력이 더 높았던 학생이…국가 발전에 기여할 기회는 사라진다”며 그 증거로 지역균형학생 들의 학점이 특기자 전형학생의 학점보다 높아진 서울대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그림 4]).

▲ [그림 4] 대학 입학 유형별 서울대 학생들의 학점 변화. ⓒ김희삼

이 보고서들은 현재 한국의 불평등이 심해지고 있는 경로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사람들도 다 아는 사실이죠. 여기에서 우리들의 행동 양식이 나타납니다. 우선 나와 내 아이의 능력에 대한 과대평가(이건 동서고금 인간의 본성 중 하나죠), 사교육에 집중한다, 그리고 내 운을 믿고 투기 시장에 뛰어드는 거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경로 하나 하나를 바로잡는 일입니다. 사교육의 근절, 대학 입시의 개혁, 직업별 보상 격차의 축소, 즉 사회 전체의 평등화가 바로 그거겠죠. [그림 4]가 보여 주듯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불평등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소득 주도 성장론’은 이런 잠재 자산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거시 정책들의 집합이 되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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