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인 칼럼] 위기의 징후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의 세 번째 국면

10월 페루의 리마에서 열린 IMF 연례 총회는 햇살 한 줄기 없는 날씨만큼이나 우울했다고 합니다. (☞관련 기사 : Is the world heading for its third global financial crisis?)

이 총회에서 발표된 IMF 금융 안정 보고서는 세계 경제가 지금 신흥 경제의 불안정성, 선진 경제 위기의 유산, 그리고 글로벌 금융 시장의 긴장이라는 3중의 과제를 안고 있으며 정책적 오류를 범할 경우 세계 경제 성장률이 3% 떨어질 수 있다고 한탄했습니다.

원자재 수출이 많은 중남미에서 열린 만큼 더 비관적인 분위기였을 겁니다. 선정성을 즐기는 투자은행답게 골드만삭스는 <2008년 금융 위기의 세 번째 파도를 환영한다>는 보고서를 내 놓았습니다. (☞관련 기사 : GOLDMAN SACHS : Welcome to the ‘3rd wave’ of the financial crisis)

▲ [그림 1] 신흥 경제 파도가 글로벌 금융 위기의 세 번째 파도이다. ⓒuk.businessinsider.com

이 보고서의 내용은 위 그림 하나로 요약할 수 있는데요, 각각 유럽(Euro Stoxx 50), 미국(S&P 500), 신흥 경제(MSCI EM) 주가의 추이를 그려 놓은 이 그림의 오른쪽 끝을 보면 신흥 경제의 주가 지수가 최근 빠르게 하락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실로 미국의 금융 위기가 끝나갈 즈음에 유럽의 재정 위기가 시작됐고, 유럽연합(EU) 나라들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는 모습을 보이자 다시 신흥 경제(EM)의 파도가 몰려온다는 겁니다.

2010년 이후의 세계 경제 성장은 중국 등 신흥 경제가 이끌었죠. 특히 중국은 천문학적인 재정을 투입했고 이에 따라 원자재 수출국의 경기도 끓어올랐습니다. 선진국에서 양적 완화로 풀린 돈이 이곳으로 이동한 것도 당연했지요. 그러나 중국의 성장이 둔화되자 신흥 경제에 들어갔던 달러가 일제히 빠져 나갔고 세계 금융 시장은 일제히 혼돈에 빠졌습니다.

몇 번에 걸친 얘기지만 저는 중국 경제가 경착륙(예컨대 3~4%의 경제 성장률)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원자재를 대량으로 소비하던 세계 2위의 경제가 10%의 성장을 구가하다 7%대 이하로 주춤하면 원자재 가격이 폭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 최대의 원자재 거래 기업인 스위스의 ‘글렌코어’마저 파산 위기에 몰렸고 콜롬비아(석유), 칠레(동), 브라질(철) 경제가 곤두박질치자, 또 다시 외환 시장, 선물 시장이 출렁이고 있습니다. (☞관련 기사 : 빚 120조원 글렌코어 휘청 … 원자재 시장 폭풍 전야)

 

미국은 괜찮은가?

2분기에 전년 동기비 3.9%의 성장률을 거둬 독야청청할 것으로 보이던 미국 경제의 성장률도 3분기에는 2%대로 떨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1970년대 후반 미국은 스태그플레이션을 벗어나기 위해, 중국은 문화 혁명의 후유증을 떨쳐내기 위해 중미 데탕트가 시작된 이래 미국과 중국의 상호 의존 관계는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미국은 중국의 저축에 기댔고 중국은 미국의 수입에 의존했죠.

이 수출 주도 성장(중국)과 부채 주도 성장(미국)의 결합은 지난 위기로 깨졌고 중국은 재정과 금융의 확장 정책으로, 미국은 수출을 늘리는 정책으로 대응했습니다. 하지만 세계 주요국의 침체에 따라 달러가 강세를 보이자 미국의 수출 증가세는 주춤해졌고, 총저축률(가계, 기업, 정부 합계)은 여전히 2.9% 수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흥 경제까지 일제히 침체 또는 위기에 빠지게 되면 미국의 ‘나 홀로 성장’이 가능할리 없습니다.

<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최근 10개의 그래프를 통해 미국 경제가 다시 침체에 빠지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미국의 침체에 관해 이야기할 때이다”). 특히 각종 제조업 관련 지표들, 즉 구매자지수(PMI), 필라델피아 연준의 산업활동지수, 뉴욕과 댈러스 연준의 제조업 지수, 제조업부문 성장률, 수출 증가율, 무역 적자 등 모든 지표가 빠른 속도로 나빠지고 있습니다. (☞관련 기사 : It’s time to start talking about a US recession)

 

한국 제조업의 구조 조정

중국 경제의 수입이 20% 가량 감소한다면, 수출의 25% 이상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 제조업이 무사할 리 없습니다. (☞관련 기사 : 쌓여만 가는 ‘재고’…한국 경제 ‘뇌관’ 될라)

통계청의 제조업 재고율 지수를 보면 지난해 8월 122.0에서 올해 8월 128.4로 높아졌습니다. 이 수치는 2008년 12월의 129.9 이래 가장 높은 수치입니다. 즉, 상품이 팔리지 않아서 재고로 쌓이는 비율이 높아졌고, 이에 따라 제조업 가동률도 지난 8월 74.3%까지 떨어졌습니다. 재고율과 가동률은 단기적인 경기를 직접 보여주는 지표들입니다.

물론 기업들의 현금 사정이 좋다면 재고율이 높다고 바로 위기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IMF 보고서에 나온 다음 그림은 마냥 안심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관련 자료)

[그림 2] 2007년에서 2014년까지 기업 부채의 변화. IMF 금융 안정 보고서 84쪽. ⓒimf.org

한국 기업의 부채도 다른 신흥 경제 못지않게 빠르게 증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미 부실이 드러난 조선 산업, 철강 산업, 석유화학 산업 등 중국의 경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기업들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관련 기사 : 정부, 연말까지 신용 평가…경제 활력 잡아먹는 ‘한계 기업’ 걸러낸다)

한국은행은 지난 6월의 금융 안정 보고서에서 영업 활동으로 원금은커녕 이자도 갚지 못하는 한계기업(이자보상배율 1 미만인 기업)의 비중이 2009년 12.8%(2698개)에서 2014년 15.2%(3295개)로 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최근 금융위원회와 기획재정부 등 관계 부처는 구조 조정 협의체를 구성해서 연말까지 신용평가를 한 뒤 내년 초부터 대대적인 구조 조정을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세계 경제의 침체는 더욱 깊어가고 외부 쇼크가 될 만한 요인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정부가 무리하게 이른바 “노동 개혁”=일반 해고의 자유화를 단행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선제적’ 구조 조정이라는 이름 아래 대규모 해고가 벌어질 전망입니다. 하지만 이런 정책이 더욱 위기를 심화시킬 것은 자명합니다.

대규모 해고와 임금 삭감으로 가격 경쟁력을 강화한다고 해서 수출이 획기적으로 늘어날 전망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가계 부채라는 대형 폭탄까지 껴안고 있는 한국 경제가 과연 안전할까요? 역사 교과서 논란이나 불러일으킬 만큼 한가한 시점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정태인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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