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발전 국가’의 종말

지금 한창 뜨거운 시사 문제 몇 개를 생각해 보자. 세월호, 가습기 살균제, 해운·조선업 구조조정과 ‘양적 완화’, 판검사 전관예우, 어버이연합, 형제복지원….

이 사건들을 관통하는 공통의 문제가 있다. 바로 대한민국 국가의 낙후성이다. 단순히 공무원들의 기강 해이나 정권의 도덕성 부재, 심지어 구조적 부패 등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훨씬 근원적 차원의 문제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유지되어 온 ‘2차 산업혁명기’의 ‘발전 국가’는 이제 내구연한을 훌쩍 넘긴 노후 건물처럼 밑동으로부터 붕괴하고 있다. 이를 대체할 수 있는 3차 혹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국가를 구상하고 건설하는 작업을 지금 바로 시작해야 한다.

국가는 계속 모습을 바꾸고 진화해 온 제도이며, 특히 산업혁명이 시작된 이래로 그러했다. 1차 산업혁명의 결과로 19세기 후반에 보편화된 자유주의 헌정국가는 그 이전의 절대왕정과 전혀 다른 국가였으며, 20세기 중반 이후에 보편화된 여러 형태의 집산주의 혹은 복지국가 또한 19세기의 국가와 전혀 다른 국가였다.

디지털 혁명이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등으로 확장되고 있는 3차 혹은 4차 산업혁명의 물결 속에서 20세기의 국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국가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한 문제이며, 또 21세기 들어 먼저 깨인 나라들에서는 이미 전면적으로 착수해 목하 진행 중인 과제이기도 하다. 1990년대 이래 전 지구적으로 시대정신처럼 되어버린 ‘협치’ 등도 그러한 ‘똑똑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흐름 속의 한 요소이다.

대한민국에서도 이는 실로 절박한 과제이다. 생각해 보라. 위에 열거한 사건들 모두가 그 발생의 원인이 국가 낙후성에 있을 뿐만 아니라 만약 1970년대 혹은 1980년대에 벌어졌다면 별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혹은 쉽게 덮고 넘어갈 수 있었을 문제들이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처럼 실제로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던 낯익은 유형의 것들이기도 하다.

이는 당시 대한민국이 겪고 있었던 산업화의 단계 그리고 그에 조응해 나타났던 당시 ‘발전 국가’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능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1960년대 이후 한국 자본주의는 중후장대 산업을 중심으로 산업 구조를 세워나가며 급속한 산업화를 시작한다. 이러한 ‘2차 산업혁명’은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사회 전체를 하나의 단일한 공장처럼 효과적으로 동원해 집산화할 것을 요구한다.

가진 것이라고는 농촌의 유휴 노동력뿐, 자본도, 기술도 지식도 심지어 자원조차 부족한 한국에서 이러한 ‘2차 산업혁명’의 논리는 1940년대의 만주국과 일본 파시즘을 모델로 하여 권위적인 국가가 온 사회를 명령하고 동원하는 ‘발전 국가’와 잘 조응하는 면이 있었고, 이는 지난 반세기 동안의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나타났다.

위의 사건들은 일부 공무원들의 일탈적인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 자원도 지식도 자본도 권력도 모두 독점한 무소불위의 거대한 국가가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그늘에서 필연적으로 자라나는 독버섯들이었다.

하지만 ‘3차 혹은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들어선 오늘날 사회에 대한 국가의 일방적인 우위란 실로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각종 디지털 기기로 무장해 전지전능, 무소불위의 정보력을 공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간의 역량은 지식과 교육 수준에서 국가를 압도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이 접하고 있는 산업 사회의 현실은 갈수록 복잡해지면서 목이 부러질 정도의 속도로 변화해가고 있다.

지금의 ‘똑똑한 국가’라면 응당 이러한 변화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더욱 수평적·상호적·민주적으로 개혁하여 더욱 효율적이면서도 큰 신뢰를 가질 수 있는 조직으로 변신해 사람들의 삶속에 녹아들어 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국가는 이러한 변신의 노력을 멈춘 상태이다. 아직도 지금이 1970년대인 줄 알고 위에 열거한 터무니없는 짓들을 벌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1970년대처럼 사정기관과 방송 매체를 잡고 눌러 버리면 되는 줄 아는 이들이 국가 기구의 중심에 들어앉아 있는 상태이다. ‘똑똑한 국가’는커녕 갈수록 위신과 신뢰만 떨어져가며, 마침내 사회에 대해 ‘영이 서지 않는’ 두려운 붕괴 상황까지 떠올리게 만든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만이 아니다. 어느새인가 ‘앙시앙 레짐(구체제)’이 되어 버린 낙후된 국가를 전면적으로 개조해 21세기형 ‘똑똑한 국가’로 탈바꿈할 실천적 구상과 시도도 필요하다.

원글은 경향신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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