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기승전 “정권”…테러방지법은 잊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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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어느 당이랄 것도 없다. 대선이 1년 남짓 다가오자 모든 정당의 관심은 정권 유지 혹은 교체가 되어 있다. 정치인들 개인 차원에서나 정당 전체 차원에서나 말도 행동도 머리 돌림도 모두 “대권”이라는 두 글자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재배치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렇게 강변하기 시작한다. 정치와 정당의 존재 이유는 집권에 있는 것이라고. 무슨 주장 무슨 포부가 있다고 한들 권력을 잡지 못하면 끝이라고. 이를 이해하지 못한 이들은 정치가 무언지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들이거나 귀찮은 잔소리꾼들일 뿐이라고.

틀렸다. 이렇게 저열한 생각이 몇십년째 한국 정치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헬조선’이 생겨난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정당의 존재 이유는 집권이 아니다. 산업사회의 변화에 따라 사회, 경제시스템을 어떻게 업데이트해야 산업적 효율성과 만인의 자유·평등·연대라는 민주주의의 가치가 구현될 것인가의 구체적 계획을 제출하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지지를 조직하는 것이다. 이 본연의 임무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을 때, 비로소 집권이라는 기회가 돌아오는 것이다.

테러방지법은 어떻게 되었는가. 올해 초 야당은 필리버스터라는 강수까지 두어가며 이 법이 통과되면 민주주의는 끝장이므로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위기감을 조성하였다. 그때 그 당의 한 의원은 짐승처럼 울부짖기도 했다. 이게 다 야당이 힘이 없어서 벌어진 일이라고. 그러니 당면한 총선에서 반드시 표를 몰아달라고. 그 당은 지금 원내 1당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이 당이 또 이 당을 지지하는 ‘민주 시민’들이 테러방지법을 철회시키기 위해 무언가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뿐만 아니다. 세월호 특조위, 백남기 농민, 사드 특위, 누리과정 예산 등 우리 사회의 결정적인 중요 의제들을 모두 뒷전으로 처박은 채 ‘경사롭게도’ 추경 방안이 합의를 보았다. 야당(들)은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게 다 힘이 모자라서 그렇게 된 것이니 이번엔 자신들에게 대권을 쥐어달라고.

이 이야기는 곧 ‘산토끼’ 이야기로 이어진다. 어차피 대선은 51 대 49의 게임이니, 본래 야당을 찍는 ‘집토끼’ 말고 중도세력을 잡아야 한다고. 따라서 이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없도록 말과 행동을 조심하여야 한다고. ‘산토끼’들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 사드에 대해, 세월호에 대해 거리를 유지하고 입조심하고 이른바 사람들에게 관심있는 ‘민생’ 의제만 톡톡 건드린다고 해서 이 ‘산토끼’들이 우르르 덫으로 뛰어드는 일은 절대로 생겨나지 않는다. 그게 다 대선이 다가오니 뻔하게 시작되는 ‘집권 전략’이라는 것을 이들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광범위한 국민들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 정당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라. 지금은 대충 우로 몇 클릭 좌로 몇 클릭 하는 식으로 선거를 기획할 수 있는 평온한 시기가 아니다. 국내나 국제나 정치, 경제, 사회 어디라 할 것 없이 근본적인 변동과 불확실성에 휘말리는 구조 변동의 시기이며, 여기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의 비전과 그것을 현실화할 수 있는 방안과 계획표를 보고 싶어 한다.

인공 지능과 로봇을 앞세운 4차 산업혁명의 도전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한계에 처한 것이 빤한 재벌 위주의 경제시스템을 어떻게 할 것인가. 임박한 국내의 산업 구조조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냉전체제의 부활이라고 할 동북아 질서의 변화를 어떻게 할 것인가. 코앞에 닥친 인구 절벽과 예상되는 세대 갈등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지구 온난화와 에너지 전환에 대한 한국의 계획은 무엇인가 등등. 이념 갈등과 진영 논리에 갇혀 정쟁과 세몰이에만 골몰하는 정당도 질색이지만, 알량한 정치 공학과 선거 마케팅만 믿고 움직이는 연예기획사 같은 정당에 더욱 신물이 나는 것이 우리의 입맛이다.

우리들에게 정권 교체의 당위성을 이야기하고 싶다면 ‘테러방지법’부터 없애라. 세월호, 백남기 농민 문제부터 풀어라. 그 다음엔 향후 5년간 대한민국의 사회·경제시스템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계획을 제시하라. 이를 하지 않은 채 기승전“정권” 어쩌고 하는 정당은 잊어버리자. 차라리 새로운 형태의 정당을 함께 구상하고 함께 만들어 나가는 쪽으로 힘을 모으는 것이 훨씬 쉽고 빠른 길이라는 생각이 점점 커져간다.

서로가 이익을 ‘반사’해가며 함께 공생하는 현재의 정당 구조가 다음 총선에서도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여기는 ‘다이내믹 코리아(Dynamic Korea)’다.

이 글은 경향신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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