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세계사 속의 촛불

‘기성 질서(status quo)’라는 말이 있다. 본래 국제정치학 용어였지만 오늘날에는 기성 질서와 그것을 떠받치는 권력 구조 또 그것을 합리화하는 담론 구조까지 총칭하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의 세상’이라는 뜻으로 폭넓게 쓰인다. 지금 온 세계는 이 기성 질서의 근본적 변화라는 거대한 구조 변동에 휘말려 들어갔다. 일찍이 남유럽 나라들에서는 2008년 경제 위기 이후로 대변동이 시작된 바 있었지만 이제 이는 더 이상 변방에 국한된 일개 소동이 아니다. 기성 질서의 설계자라고 할 영국에서는 노동당의 당권이 완전히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브렉시트’라는 황당한 사태가 터지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세계 제국의 중심인 미국 워싱턴의 권력이 기성 질서의 거의 모든 것-금융 자본주의만 빼고-에 전쟁을 선포한 인물에게 넘어갔다. 곧 있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도 극우파가 승리를 거머쥘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제 기성 질서의 마지막 보루는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뿐이라는 힘없는 소리가 나온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기성 질서 타파의 흐름은 반이성주의와 온갖 퇴행적인 반동의 요소들로 점철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성 질서에서 그나마 긍정적인 요소였다고 평가해야 할 민주적 절차와 개방성, 소수자들에 대한 관용과 평등 등의 정신은 지금 도처에서 위기에 처하고 있다. 영국, 미국, 프랑스가 지배하는 베르사유 체제가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 파시즘과 호전적 민족주의를 비롯한 온갖 반동 세력이 준동하던 1930년대 초를 요즘 많은 이들이 떠올리며 논의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이다.

그 결과 ‘어제의 세계’에 아무 애착이 없고 오히려 그것의 붕괴를 반겨야 마땅한 이들조차도 지금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가 두렵기만 하다. 기성 질서의 변화는 더 나은 세계가 아닌 오히려 더욱 어두운 야만과 폭력과 기만의 세계로 향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공포가 퍼져 가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거대한 절망의 흐름에 도도히 맞서는 나라를 알고 있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우리에게 야만과 폭력과 기만은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한 이름들이다. 가깝게만 보아도 우리가 지난 10년간 겪어온 세상은 실로 가공할 만한 야만과 폭력과 기만으로 점철된 세계였기 때문이다. 4대강 공사,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 용산참사, 가습기 살균제 사건, 세월호 사고, 공영방송 강탈, 역사교과서 국정화, 백남기 농민 사건, 재벌 대기업의 횡포, 극심한 불평등 심화…. 이러한 야만과 폭력과 기만의 길고 긴 어둠의 터널은 박근혜 게이트를 거쳐 급기야 ‘비아그라·팔팔정 게이트’까지 이어졌다.

2016년 한반도에서 우리도 기성 질서 타파의 촛불을 밝혔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야만과 폭력과 기만이 사라진 세상이다. 김수영 시인의 말대로 ‘먼저 누운 풀이 먼저 일어난다’. 미국의 트럼프 지지자들 중 일부는 기관총을 난사하며 여성과 무슬림과 이민자들에게 마구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모양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많은 이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노골적인 혐오와 공격의 태도를 보이며 으르렁대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러한 야만과 폭력과 기만에 질릴 대로 질린 상태이다. 우리는 다른 세상을 원한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헌법의 정신이 실현되며, 정치와 경제가 공정하게 작동하면서 투명하게 감시되는 동시에 능력과 열의를 가진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누구나 자신의 양심과 이성에 따라 말하고 행동할 수 있으며, 집단의 이성과 양심이 곧 보편타당한 현실의 법률이 되며, 약육강식과 각자도생이 아닌 함께 도우며 함께 즐기며 살아가는 세상. 우리가 주말마다 함께 밝힌 촛불은 그런 세상의 염원을 담고 있다.

오늘도 촛불이 켜진다. 명목만 남은 대통령은 염치 불고하고 버틸 것이며 계산속이 복잡한 야당 정치인들은 집회에 모인 머릿수나 세려 들 것이니 이 사태가 언제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날지는 헤아리기 힘들다. 하지만 우리가 밝힌 촛불은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갈 길의 큰 방향을 이미 결정지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사람의 숨통을 조이던 기성 질서는 무너졌다. 이제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와 정의와 이성과 양심이 실현되는 세상으로 뜻을 모으고 있다. 불길한 암흑이 덮쳐오고 있는 지구촌의 한구석 한반도에서 우리는 오늘 밤 희망과 진보의 촛불을 높이 들어 올린다.

원글은 경향신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원글 보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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