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촛불 광장에서 세상을 ‘리셋’ 하자

[강양구의 親book]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이대희 기자

촛불집회가 세상을 바꾸고 있습니다. 아마 훗날 역사서는 (어쩌면 더 길어질 수도 있겠지만) 지난 여섯 차례의 촛불집회를 두고 ‘촛불혁명’으로 기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집회의 표면적 구호는 박근혜 대통령 퇴진이지만, 여기서 ‘박근혜’는 단순히 대통령 개인을 지칭하는 데 그치지는 않은 듯합니다. 박근혜로 대표되는 구체제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우리는 지난 수년을 겪으며 서서히 깨달았습니다. 232만 개의 촛불에는 이대로는 더 살 수 없다는 절박함이 타올랐습니다.

최근 수년 간 나타난 신조어와 새로운 사회적 현상이 이런 추론을 뒷받침합니다. 헬조선은 이제 누구나 아는 명사가 되었습니다. 청년 세대는 차라리 세상이 망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내뱉습니다. 사실상 6공화국 체제, 곧 87년 체제의 벅찬 시작이 이처럼 안타까운 결말로 이어졌음을 우리는 씁쓸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중입니다.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창비 펴냄)는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 펴냄),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따비 펴냄), <단속사회>(창비 펴냄) 등의 책에서 생생한 현장의 사회학을 풀이한 사회학자 엄기호의 신작입니다.

엄기호는 섬찟하기까지 한 제목의 이 책에서 한국이 이미 망했다고 결론짓고, 사회에 좌절한 사람들의 절망을 ‘리셋’에의 욕구로 정리합니다. 이어 그들이 왜 ‘차라리 망해버려라’는 저주를 내뱉는지 따라갑니다. 그리고 리셋에의 욕구를 함께하는 삶의 복원으로 이끄는 방법을 모색합니다.

‘강양구의 친북’은 지난 5일 서울 서교동 <시사통> 스튜디오에서 엄기호와 만나 책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촛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광화문의 촛불에도 리셋 욕구가 배어있다고 진단한 엄기호는, 지금의 평화 집회를 이어가는 시민이 실은 “칼을 갈고” 나왔다고 진단하고, 제도권 정치가 시민의 욕구를 제대로 받아 안지 않는다면 더 큰 절망이 기다리리라고 말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이번 집회를 계기로 ‘민주주의의 전면화’가 광장에서부터 이뤄져야한다고도 언급했습니다. ‘나는 기꺼이 점으로 나오되, 타인은 자기 목소리를 가진 동료 시민으로 여기는 태도’를 우리 일상에서도 이어가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

▲ 사회학자 엄기호. ⓒ프레시안(손문상)

세상이 망했으면 좋겠다는 바람

강양구 : 젊은 작가 가운데 한국 사회 현실에 가장 밀착한 소설을 선보이는 이의 하나가 장강명 작가입니다. 장강명 작가가 최근 낸 소설 제목은 <우리의 소원은 전쟁>(예담 펴냄)입니다. 북한 김정은 정권이 붕괴된 후 한반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장르 소설 문법으로 그려냈습니다.

실제로 요즘 우리는 주변에서 ‘차라리 전쟁이라도 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헬조선 현실에 시달린 이들의 극단적인 바람이 투영된 이야기죠.

오늘은 현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를 소개합니다. 사회학자 엄기호 박사가 최근 낸 책입니다. 엄기호 박사는 누구보다 현실에 밀착한 연구 성과를 여러 권의 책으로 정리했습니다. 장강명 작가의 그것과도 궤를 같이 하는 듯한 책 제목이 인상적입니다.

엄기호 : 제가 가르친 학생 한 명을 보면서 든 생각을 제목으로 옮겼습니다. 지난해 <샤를리 앱도> 사건 당시 제가 우연히 프랑스에 있었습니다. 프랑스 도착 후, 프랑스에서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흥미롭게 지켜보면서 여태까지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회를 바꾸려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강양구 : 열쇳말이 ‘리셋’인데, 어떤 의미입니까?

엄기호 : 우리가 컴퓨터 쓰다가 도저히 더 고쳐 쓸 수 없을 때 초기화(리셋)해버리죠. 같은 의미에서 우리가 여태 살아온 현실은 구제불능이라는 의미를 부각하기 위해 리셋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우리가 여태 이야기한 혁명이나, 하다못해 개량만 하더라도 여태까지 사회 질서에 바탕을 두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장치였죠. 하지만 절망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리셋은 혁명과 다릅니다. 애초에 글러먹은 나라니, 완전히 무너져야 한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다 망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현실을 회피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강양구 : 왜 사람들이 리셋을 원하는가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선 현대 한국 사회를 견뎌가는 사람들의 방식을 정리해 보죠. 얼마나 우리 사회가 견디기 힘든 곳인가를 알아야 리셋의 욕망도 잘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요. 책 앞부분에 헬조선으로 묘사되는 파산한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태도를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셨어요. 냉소, 유예, 도피, 리셋입니다.

첫 번째는 냉소입니다. 매사에 냉소하는 사람들입니다.

엄기호 : 네. 이 네 가지 유형 분류 아이디어를 트위터 이용자 ‘쓺’이라는 분의 글에서 얻었습니다.

냉소하는 자의 경우, 열심히 노력하다 좌절해 냉소함으로써 자신을 방어합니다. 해도 안 되는데 다행히 가진 건 조금 있다면, 내가 가진 자리에 머물면서 ‘뭐 한다고 되겠느냐’는 태도를 보이죠. 어느 정도 가진 게 있는 사람이라야 냉소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강양구 : 전문직 종사자, 정규직 노동자, 이른바 강남 좌파라 불리는 이들이 이 부류에 포함되는 것 같습니다.

엄기호 : 네. 비정규직 노동자나 가진 게 없는 자가 냉소하기는 어렵죠. 냉소하려면 시간 여유가 조금은 있어야 하고, 물러날 자리가 있어야 하거든요.

강양구 : 유예하는 태도도 언급하셨어요.

엄기호 : ‘쓺’은 유예를 두고 ‘일본 오타쿠와 대응한다’고 정리하셨는데, 저는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자기계발의 양상이 바뀌었는데, 현대의 자기계발 열풍에 유예하는 태도가 있다고 저는 봅니다.

옛날 자기계발은 ‘하면 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이뤄졌죠. 지금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자기계발하는 분이 있지만, 요즘 두드러지는 건 자기계발을 일종의 도피 수단으로 삼는 태도입니다. 제가 <공부 중독>(하지현·엄기호 지음, 위고 펴냄)에서 쓴 것처럼, ‘나는 아직 공부하고 있으니 실전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죠. 실전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아직 내 공부가 부족하다’라고 생각해 자기계발에 더 몰입합니다. 공부가 파산된 현실을 메워주는 일종의 판타지 역할을 하죠. 공부가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알리바이가 되었다고 할까요.

교사 세계에는 ‘연수 중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부분 교사가 의무이기에 교사 연수를 이행하지만, 그중에는 여러 가지 내용의 연수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분도 있습니다. 좋다는 연수는 뭐든 찾아다니시죠. 그분들 일부가 ‘교실이 너무 끔찍하니, 연수가 일종의 도피처가 된다’는 말씀을 하세요.

강양구 : 도피에 관해서도 설명해 주시죠.

엄기호 : <단속사회>(창비 펴냄)에서 제가 ‘곁’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사람에게는 조언과 충고의 공동체인 곁이 있어야 합니다. 곁이 강할 때 사람이 더 현명해지죠. 그런데 지금 우리는 곁이 파괴된 상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곁은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사회의 안감’과 같습니다. 사회는 형체가 없는 구름과 같은데, 안감의 역할을 하는 결사체, 즉 사람들의 작은 모임(곁이 살아있는 모임)이 있어야만 그 형체가 흩어지지 않죠. 곁이 존재해야만 사회는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쓴 이후 강연 다니면서 곁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다녔는데, 들으시는 분들이 좋아하세요. 그런데, 들으시는 분들 대부분이 제가 말하는 곁을 사회의 안감이라기보다, ‘나만의 작은 사회’로 잘못 이해하시는 듯했습니다. 우리끼리 잘 살면 되지, 사회에 관해서는 모르겠다는 거죠.

만일 곁의 개념이 잘못 전달되면 현실을 도피하는 중산층 식자 중심의 커뮤니티로 전락하고 맙니다. 왜냐하면, 자원을 가진 이들이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강양구 : 사회가 없어도 우리 조직은 충분히 굴러간다는 생각에는 우리가 쓸 자원은 충분하다는 현실 인식이 전제되었겠죠.

엄기호 : 네. 자기들끼리 빗장 건 사회를 만든다면, 그들은 타인에 관한 공동 책임은 전혀 느끼지 못하죠. 이것이 도피입니다. 역시 냉소, 유예처럼 비관적 현실과 거리를 두고자 하는 태도죠.

한국, 노오력 없이는 살 수 없는 사회

강양구 : 마지막 키워드가 리셋입니다. 이 책에서 사람들이 왜 세상을 리셋하고 싶어 하는지에 관한 매커니즘을 정교하게 정리하셨어요. 사람들이 노력해도 일이 안 풀릴 때, 잘못하면 자기혐오에 빠지거나 우울증을 앓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리셋을 원하는 사람은 이와 다른 길로 빠지는 것 같습니다.

엄기호 : 세상을 비관하는 청년들의 유행어 중 ‘노오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력하라”고만 말하는 이른바 ‘꼰대’들을 비웃는 용어죠. 저는 노력하기만 하는 삶이 우리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가를 지난해 내내 들여다봤습니다.

노오력의 문제는 사실 청년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심지어 대기업 직원마저 노력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죠. 노력을 강조하는 구조는 우리가 끊임없이 무리하게끔 합니다.

열심히 사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삶에 무리수를 던지게 되면, 우리 사회 구조상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게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의 한계를 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강양구 : 구의역에서 목숨을 잃은 19살 청년이 바로 노오력 사회의 희생양이잖아요. 그 분은 규정을 어기지 않으면 할당량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규직 전환은 불가능했죠.

엄기호 : 그렇죠. 저는 이걸 개인의 문제라고 보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는 우리가 무리수를 던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게끔 만들어졌습니다. 괴물은 제도가 만들고, 제물도 제도가 만듭니다. 구의역 사건이야말로 이 사회가 노오력을 강조해 어떻게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노오력을 정당화하는 담론이 (제도권) 교육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너에게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는 주문이죠. 내가 왜 계속 노오력해야 하는가? 나한테 잠재력이 무한하기 때문이라는 거죠.

이 이데올로기가 괴상한 방식으로 연결됩니다. 성과를 내야만 내 잠재력을 꽃피운 인간으로 인정받습니다. 성과를 내지 않으면, 나는 내 잠재력을 발휘하지 않은 인간이 됩니다. 성과를 못 낸다면 나는 게으른 인간이라는, 윤리적인 차원의 비난을 받게 됩니다. 결국,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나는 엄청난 열패감을 갖게 됩니다.

강양구 : 이 부분을 두고 책에서 ‘정신승리 매커니즘이 작동한다’고 하셨어요.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해 낙오하면, (내가 원인임을 인정할 경우 나는 비윤리적 인간이 되므로) 원인을 내가 아니라 타자에게 투사하게 된다는 거죠.

엄기호 : 네. ‘내 탓’을 해 버리면 소진되어 버립니다. 노오력 사회에서 내 탓을 하지 않으려면 끝까지 노력해야 하는데, 사람에게 한계가 있거든요. 절대 무한한 존재가 아닙니다. 결국 소진되죠. 이렇게 소진되어 버리면 우울해집니다.

그러다 보니, 반대편에서는 절대 내 탓을 하지 않는 태도를 취합니다. ‘이 모든 건 (내가 아니라) 너 때문’이라는 태도를 취하게 되죠. 분노가 바깥으로 터져 나옵니다.

왜 우리는 혐오하는 존재가 되었나

강양구 : 동료를 탓하고, 사회적 약자를 공격하는 태도 말이죠?

엄기호 : 네. 영국의 문화인류학자인 폴 윌리스에 따르면, 우리는 ‘이 사회가 나를 죽음으로 몰아간다’는 걸 간파하긴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파한 결과를 왜곡하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합니다. 왜곡하는 장치가 인종주의, 성차별주의와 같은 것들이죠. 미국의 백인 생산직 노동자의 분노가 인종주의, 성차별주의에 의해 어떻게 왜곡되어 이번 대선에서 폭발했느냐를 우리는 생생히 보았죠. ‘저들 때문에 내 몫을 빼앗겼다’, ‘저들이 언제 내 것을 빼앗아 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작동했습니다. 잘못된 사회를 왜곡해 전달하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한 결과죠.

정신의학을 전공한 이들에 따르면, 일종의 엄청난 피해망상입니다. 피해망상은 과대망상과 함께 옵니다. 여건만 좋아진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는 만능감을 한편에 유지하면서, 내가 못하는 이유를 그들에게 돌리죠.

대개의 경우, 이런 과대망상과 피해망상을 연결하는 고리는 음모론입니다. 엄청난 수준의 음모론이 횡행하죠. 왜냐하면, 현실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건, 그렇게 음모론을 강조하는 이들이 조각난 사실의 파편을 조립해 내 말이 사실임을 강조한다는 겁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한 줄 요약’으로 설명되는 것처럼, 복잡한 현실을 회피하려 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한 줄로 설명되지 않을 만큼 복잡하거든요. 현실의 모순을 파악하려면 ‘두껍게 기술하기’라는 개념 그대로 두껍게 읽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잡한 건 복잡하게 이해해야 하죠. 하지만 우리 현실에서 이런 사람은 ‘설명충’이 되어 버립니다. 이처럼 급한 상황에 한가한 소리한다고 타박 맞죠.

현실을 이해할 매뉴얼이 깨지면, 결국 사람들은 세상을 얕게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단순해져요. 이분법적으로 사고하게 되고요.

결국, 한편에서는 소진되어 우울하게 견디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큰 망상에 빠져 끊임없이 화내는 사람이 존재하죠. 다수의 사람은 이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고 저는 봅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사건이 벌어지니, 갈피를 못 잡죠.

특히 박근혜 대통령 취임 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은 개개인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세월호 참사는 비슷한 예를 찾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악명 높은 참호전을 두고 발터 벤야민은 “총을 쏘지만 누가 죽는지, 어떻게 죽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죠. 공중전이 벌어지고 탱크가 등장하지만 나는 참호 안에만 갇혀서 도대체 무슨 참상이 일어나는지 확인조차 못하죠.

세월호 참사도 마찬가지입니다. 300명이 넘는 사람이 희생되는 걸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하고 눈앞에서 지켜만 봤습니다. 어마어마한 (집단) 트라우마입니다. 이건 전쟁에서도 보기 힘든 참사입니다. 저도 마찬가지고 제 주변을 봐도 그렇습니다만, 도무지 개인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참사가 벌어진 겁니다.

이러니 아침에 일어나면 뉴스 보는 게 두렵고, 그저 아무 일도 일어나지 말기만 바라는 사람이 실제로 생깁니다.

강양구 : (사회 차원의) 극단적인 무기력.

엄기호 : 네. 우리는 기쁘게 살고자 노력하지 않습니다. 덜 괴롭고자 노력합니다.

이 책을 쓸 때, 조르조 아감벤 등 생명 철학자들의 개념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사회적 생명과 육체적 생명을 분리해 해석하는 내용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국말로 풀이하자면, ‘목숨’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목숨만 연명하고 산다’는 말에서 목숨은 우리의 사회적 삶이 육체적 생명 유지 수준만도 못한 수준으로 떨어졌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애초 이 책을 쓸 때 가제는 ‘목숨이 된 삶’으로 생각했습니다.

▲ 이제 사람들은 헬조선의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고 있다. 더는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릴 때, 사람들은 혁명 대신 리셋을 말하기 시작한다. ⓒ프레시안(최형락)

한국은 이미 망했다

강양구 : 결국 자기혐오에 빠져 현실을 회피하려 하는 사람, 끊임없이 남 탓만 하는 사람,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사람 모두가 마음 한 구석에는 ‘이놈의 세상, 차라리 망해라’는 생각을 갖게 마련이다?

엄기호 :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망했으면 좋겠다’거나 ‘망할지도 모르겠다’는 수준의 저주였는데, 최근 자주 들은 말은 우리 사회가 이미 망했다, 혹은 망해야 한다는 겁니다.

강양구 : 사실 ‘헬조선’이라는 표현 자체가 이미 한국은 망했다는 뜻이잖아요?

엄기호 : 네. 이제 사람들이 기존 한국 체제가 망했음은 간파한 것 같습니다. 이제는 왜 망했느냐,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관해 증오와 차별과 같은 장치가 작동하죠. 증오와 차별이 사회적 약자에게만 향하는 건 아닙니다. 기득권, 지식인 계층에게도 향하죠. 요즘 흥미로운 현상의 하나는 기득권을 향한 분노가 엄청나다는 겁니다. 대표적인 예가 정유라 씨 부정입학에 관한 사람들의 분노죠.

강양구 : 요즘 대중문화 주요 코드의 하나가 기득권을 타깃으로 설정하는 건데, 이게 일종의 오락거리가 된 듯합니다.

엄기호 : 기득권을 비판하긴 하지만, 기득권을 낳은 권력의 편중, 이를 불평등하게 재생산하는 제도에 관한 비판에 이르진 않죠. 더 중요한 건 ‘너희(기득권) 망해라’는 정서입니다. 이런 증오는 지식인에게도 똑같이 향하죠.

이유가 없지는 않습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두고 서울대병원에서 일어난 일이나 안종범 전 경제수석, 김종 전 차관과 같은 사람을 보면, 한국의 지식인이라는 자들이 눈곱만한 자율성도 갖지 못하고, 직업에 관한 전문가적 자존감도 없잖아요. 그들이 최소한의 직업윤리라도 갖고 있었다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어요.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에 반 엘리트주의 정서가 강해졌습니다. 사실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죠.

강양구 : 세계 각지에서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거물 정치인이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니까요.

엄기호 : 미국 대선을 보면 얼마나 웃깁니까. 기득권층을 혐오하는 이들이 거대 재벌을 대통령으로 뽑았잖아요.

강양구 : 트럼프가 뜬 방송에서 유행한 말이 “넌 해고야”인데, 해고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이 그를 지지했으니 아이러니죠.

복수를 원하는 사람들의 열망이 리셋

엄기호 : 오직 트럼프가 기존 (정치) 질서에 속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지지했죠.

필리핀 두테르테의 출현 역시 리셋의 차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가 필리핀에 살아봤습니다. 필리핀 사회에서 두테르테가 나온 배경을 조금은 이해합니다. 사람들이 정말 지쳤거든요. 국가가 너무 멉니다.

필리핀 피플파워 혁명의 주역이었던 글로리아 아로요가 광장에서 취임했습니다. 당시 제가 그 광장에 있었습니다. 그랬던 아로요가 필리핀 역사상 가장 부패한 대통령이 돼 버렸죠. 그러니, 필리핀 사회에는 기존 지배계급뿐만 아니라, 그들에 저항하던 소위 민주화 운동의 주역에 관해서도 큰 불신이 있습니다. 저는 이 불신이 정당하다고 봅니다. 이처럼 너무 지쳤을 때, 두테르테처럼 선악이 분명한 사람이 나타나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단 하나, 마약으로 정리해 “이를 말소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필리핀의 리셋을 원하던) 사람들은 그의 폭력적 방식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죠.

이 책에서 제가 리셋과 혁명의 차이를 설명했습니다. 리셋을 지배하는 정념은 복수와 원한입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이런 일도 할 수밖에 없다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해서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겁니다. ‘부수적 피해(콜래트럴 데미지)’라는 개념 자체가 매우 큰 문제가 있는데, 리셋은 이를 주목적으로 치환해 버리죠. 리셋을 원하는 이들은 르상티망(원한)에서 얻는 통쾌함 외에는 기쁨을 알지 못합니다.

강양구 : 이 책에서 국가가 외적의 침입, 자연재해, 시장의 변덕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리라는 믿음을 갖고 사람들이 국가의 통제를 받아들였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1997년 외환위기 때 국가가 시장의 변덕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걸 체험했습니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경험하면서 끊임없이 국가의 부재를 체험했습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때 많은 사람이 광장으로 나섰지만, 일부 성과에도 불구하고 조롱당한 기분을 느껴야 했죠. 결정적으로 세월호 참사도 지나야 했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국가에 관한 믿음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세상이 망했으면 좋겠다는 리셋 욕구도 그래서 나왔겠죠.

지금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서 희망과 기대를 갖는 한편으로는, 그들이 세상의 리셋을 원하는 사람들과 얼마나 다를 것이냐는 걱정도 듭니다.

엄기호 : 모든 광장의 정치, 광장의 정념은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광장이 열렸다는 건 우리의 일상이 엉망진창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일상에서 (사회 모순의) 수리가 가능했다면, 다르게 표현됐겠죠. 하지만 일상에서 수리할 수 없으니 광장을 통해서라도 뭔가를 바꿔보고 싶다는 욕망이 나왔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이 사회는 구제불능이다, 이 사회를 그대로 둔다면 더는 살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광장으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광장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 이에 관한 원리, 체험이 나오지 않고 광장이 닫힌다면 다시금 광장의 조증과 일상의 우울을 반복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탄핵안이 부결되면, 이제 더는 기존의 평화 집회 방식이 작동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난 3일 열린 사상 최대 규모의 촛불집회 전경. ⓒ프레시안(최형락)

탄핵안 부결되면 촛불은 칼이 될 것

강양구 : 만일 오는 9일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부결된다면, 여태 질서를 지킨 광장의 촛불이 어떻게 바뀔지 걱정스럽습니다. 한편으로는, 촛불의 힘에 의해 의미 있는 결과가 도출됐음에도 우리 삶이 변하지 않을 경우 사람들이 입을 상처도 걱정되고요.

엄기호 : 우선 촛불집회에서 평화 시위를 이어가고 광장의 질서를 지키려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에 관해 이야기해 보죠. 촛불집회가 끝난 후 쓰레기를 알아서 치우는 분들을 보고 ‘억압을 내면화했다’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런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저 행동을 퍼포먼스라고 봅니다. 연기하는 거죠.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저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과장된 태도로 연기한다고 봐요.< 이 (평화로운) 제스처가 안 먹히는 순간(국회에서 탄핵안이 부결되는 순간), 더는 쓰레기를 치우지 않을 겁니다. ‘너 꼭 봐’라며 열심히 청소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도 보지 않았다면, 빗자루 던져버리는 건 당연하죠.

강양구 : 탄핵안이 부결되면, 이번 주말 난리날 수도 있겠다는 거군요.

엄기호 : 난리 나겠죠.

(정치인과 언론이 촛불 민심을) 크게 오판하는 것 같아요. 촛불집회에 해학이 넘치고, 축제 같은 집회가 이어진다고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칼 갈고 있어요. 많은 사람이 광장의 군중을 보고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김수영의 시를 떠올리겠지만, 제가 볼 때 촛불집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풀이 아니라 풀 아래에 감춰진 칼입니다.

강양구 : 세월호 참사 때 광장에 나서지 않은 많은 분도 지금 광장에 나오셨습니다. 이들이 나선 중요한 계기 중 하나가 ‘이번에는 (변화가) 가능하다’는 기대감을 가지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엄기호 : 그리고 ‘이번에는 확실히 (변화)해야 한다’는 거죠. 제가 아는 한 분은 세월호 참사 때 심리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노란 리본도 달지 않고 다니셨어요. 방송에 관련 뉴스가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리셨죠. 이 사태를 감당할 수 없어서 외면했어요.

그런데 이 분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한 달 전에 갑자기 노란 리본을 달더라고요. 왜 다느냐고 물어봤더니, ‘이제는 달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광장이 열린 다음에는 정말 핏발 선 눈으로 광장으로 나가십니다.

물론 232만 명 전부가 그렇진 않겠지만, 저 중에는 분명히 세월호 참사로 상징되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마음이 지옥으로 변했는데, 이번 정국을 보고 칼이 되어 일어난 사람이 많으리라고 봅니다.

문제는 이번 정국 이후에 우리 사회가 어떻게 달라지느냐는 겁니다. 물론 개헌을 포함해 제도와 체제로서의 민주주의에 관한 고민을 많이 해야겠죠. 하지만, ‘왜 그간 우리의 일상이 그토록 구제불능이 되었느냐’에 관한 고민을 더 깊이 해야 합니다.

민주주의 전면화가 리셋을 극복할 길

강양구 : 책 뒷부분에서 대안을 이야기하셨어요. 세상의 리셋을 원하며 복수의 정념을 마음에 품은 상태에서 메시아처럼 여겨지는, 나의 복수를 대리해 줄 (두테르테와 같은) 사람을 대통령에 앉힌들 세상이 달라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하셨어요.

엄기호 : 저는 ‘미리 살아본 사람이 이후를 살아갈 수 있다’고 표현합니다. 이후에 어떻게 살지에 관한 단초라도 지금 현실에서 살아봐야 합니다. 나의 소중한 삶이 있고, 유지하고 싶은 중요한 관계가 있으므로 현실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때에야 원한과 복수의 정념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고 싶은 희망이 분출될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키워드가 존엄과 안전입니다. 존엄의 관점에서 보자면, 저는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이 ‘민주화는 실패했다’는 글로 가장 정확히 설명했다고 봅니다. (☞ 바로 보기 : <경향신문> 민주화는 실패했다)

민주주의는 제도와 체제의 문제이지만, 기본적으로 경험의 문제입니다. 내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경험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존엄한 존재로서 대접받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타인을 존엄한 존재로서 대해야 합니다. 존엄은 관계의 문법입니다. 민주화는 모든 사람이 존엄하다는 관계의 문법을 보편화하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홍기빈 소장의 글을 제 식으로 풀어보자면, 그간 우리의 민주주의는 광장과 투표소에 멈춰버렸습니다. 특히 심각하게 (민주주의가) 멈춰버린 곳이 있습니다. 직장입니다. <일터괴롭힘, 사냥감이 된 사람들>(류은숙·이종희·서선영 지음, 코난북스 펴냄)이라는 책을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우리의 직장은 아수라장에 가깝습니다. 요즘 청년이 취업 후 엄청난 굴욕감을 느낍니다. 청년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 또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예요. 

강양구 : 1990년대 초중반만 하더라도 작업장 민주주의 등의 논의가 꽤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직장 민주주의는 포기하고, 어떻게 하면 회사 바깥에서 좋은 삶을 꾸려갈 것이냐는 데 더 집중하게 된 것 같습니다.

엄기호 : 삶의 소비화가 일어난 거죠. 직장에서의 굴욕은 어쩔 수 없으니 감수하고, 대신 그 보상으로 돈을 많이 받아서 여가 시간에 즐겁게 살겠다는 모델이 대안으로 대두됐죠. 문제는, 돈을 그만큼 못 번다는 겁니다. 그러니 직장 바깥에서 좋은 삶도 유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노동시간은 더 늘어나고만 있죠. 나아가 직장 내 위계는 신분제나 다름없는 비정규직 차별 등에 의해 더 공고해졌죠. 여기에 존엄은 없습니다. 이러니 우리의 일상은 늘 우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는 이 우울함을 광장의 조증으로 대체하고 있죠.

저는 지금 열린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더 전면화하는 논의가 일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평등입니다. 평등이 너와 내가 똑같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대할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평등에 기초한 민주주의 사회로 이행하지 않는다면, 설사 대통령이 바뀐들 내 삶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그 뒤에 찾아올 허탈함은 더 클 수 있습니다.

제가 책 마지막에 든 사례가 있습니다. 내가 만일 광장에서 한 고등학생의 발언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후 박수쳤다면, 나의 행동은 그 학생을 나의 동료 시민으로 여긴다는 서약입니다. 존엄의 핵심에는 네 얘기를 들을만하다는 인정이 있습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태도가 존엄의 핵심입니다. 초등학생이 이야기하고 고등학생이 이야기하는데 만일 그들을 액세서리처럼 생각하고 박수친다면, 이는 매우 못된 짓입니다. 반면, 광장에서 아이들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마음이 동해 박수쳤다면, 그 태도를 광장에 가두지 말고 일상에서 이어가야 합니다. 어떻게 타인을 평등한 동료 시민으로 여길 것이냐는 게 관건입니다. 민주주의의 기초에 존엄의 평등이 있다는 겁니다.

기꺼이 점이 되되, 타인은 점으로 여기지 말자

강양구 : 230만 명이 넘는 촛불이 광장에 모였는데, 이들 모두가 존엄함을 가진 한 명의 시민으로서 대등하게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 관계가 광장을 벗어났다고 해서 사라져서는 안 되고, 계속 발전해야 한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엄기호 : 네. 이를 위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광장에 갈 때 우리 모두 마찬가지 마음이겠지만, 기꺼이 점이 되겠다는 뜻을 가집니다. 저는 이걸 ‘협력의 조력’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항상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마음가짐이 협력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지금 이 마음이 많은 사람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큰 희망으로 봐야 합니다.

문제는, 내가 점이 되겠다고 해서 광장에 나갔지만, 그 마음가짐은 나만의 것이라는 겁니다. 타인이 나를 점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은 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만일 타인이 나를 숫자의 하나로만 본다면, 그는 나의 협력을 동원으로 여깁니다. 이 마음가짐은 어쩌면 이 모든 사태의 근원(?)으로 볼 수 있는 새마을운동 마인드죠.

다른 사람을 동원의 대상이 아닌, 나와 함께 협력하는 존재로서 존중하고 지켜줘야 합니다. 나는 기꺼이 점이 되겠지만, 나는 저 사람을 점으로 보지 말고 자신의 목소리를 갖고 나와 함께 하는 동료 시민으로 봐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생각이 맞물려야 합니다.

강양구 : 이런 마음가짐이 광장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이어져야 되겠죠. 우리는 조직에 묶였지만, 직장 동료를 조직의 점으로 대해선 안 되니까요.

▲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엄기호 지음, 창비 펴냄) ⓒ프레시안

엄기호 : 이런 점에서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우리의 언어나 기예가 조금 부족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광장에 나와 자신이 박근혜를 찍었다며 “이럴 줄 몰랐다”고 말씀하실 때, ‘이제야아셨습니까’하는 태도를 지녀선 안 됩니다. 심지어 이런 논조의 기사도 나오는데, 매우 위험한 태도입니다. 이제 알았느냐는 건 조롱입니다. 아무리 점잖게 표현한들, 이 태도는 ‘나는 알았지만 너는 몰랐다’는 겁니다. 우리 어릴 때도 “너 그거 이제 알았냐”는 식으로 말하는 반 친구가 한 명씩은 있었잖아요. 매우 오만한 태도죠.

강양구 : 다음 책도 준비 중이신가요?

엄기호 : 쓰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과 짝을 이루는 책으로 교육 관련 책을 준비 중입니다. 무한한 잠재력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노오력하게끔 해 파괴하는 교육에 맞서는 좋은 교육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자신을 돌볼 줄 아는 사람을 만드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책입니다.

강양구 : 서로 배려하는 사회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관한 단초를 모색하는 책이라고 봐도 되겠군요.

엄기호 : 네. 그리고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무엇이었느냐에 관한 책도 준비 중입니다. 제가 정치학자가 아니니만큼 민주주의를 설명하는 책은 아니고요, 우리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경험했으며, 어디서 경험하지 못했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책에서 협력의 문제를 강조할 예정입니다.

제 책이 내용은 어두울지 몰라도, 글쓰는 사람으로서 저는 행복한 편입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니까요. 교사나 학자만 만나는 게 아니라 바리스타, 요리사를 요즘 많이 만납니다. 이분들이 고군분투하시는 모습을 보면, 제 책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절망적이지는 않다는 생각도 합니다. 이분들은 우리에게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걸 잘 보여주시거든요.

강양구 : 오늘 내용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엄기호 : 감사합니다.

원글은 프레시안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원글 보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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