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개헌, 서두를 일 아니다

87년 헌법의 여러 문제 특히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에 물론 공감한다. 또 지금까지 의회와 학계에서 개헌안을 두고 많은 고민과 논의를 축적한 바 있다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지난 2개월간 우리 눈앞에 실로 경악스럽게 드러난 대한민국 권력 구조의 성격과 문제점은 개헌 합의가 그러한 기존의 논의를 훌쩍 넘어 훨씬 더 근본적인 지점에서부터 다시 구축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헌법이란 본래 국가와 그 권력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밝히는 문서가 아닌가.

지난 2개월간 민낯의 일각이 드러난 대한민국의 권력은 민주주의 국가와는 거리가 먼, 사실상 ‘식민 권력’이라고 해야 옳다. 스스로를 국민의 일부가 아니라 그 위에 군림하는 자들이라고 여기는 극소수의 지배 집단이 존재한다. 이들은 나라와 사회 전체를 일방적인 지배와 수탈의 대상으로 삼으며, 국가 조직 전체를 오로지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기구로 운영한다. 민주주의나 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이러한 국가의 압도적 폭력 앞에서 사회 전체가 무릎을 꿇는다. 자유와 도덕의 원칙은 모두 팽개치는 물건이 되고, 사회는 줄서기 경쟁의 아수라장이 된다. 이런 면에서 지금 존재하는 대한민국의 국가 권력은 1930년대 일제 총독부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진단이 과장이라고 여겨지는 분들은 고 김영한 민정수석의 일지에 드러난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지시 및 훈시 사항들을 읽어보라. 지배 집단의 지독히 편협하고 왜곡된 이념과 이익에 따라 국익을 정의하고 이에 맞추어 사회 전체에 대해 그야말로 전방위적이고 미시적인 사찰과 겁박을 감행하는 것이 청와대의 주된 업무이다. 그 과정에서 국정원과 검찰을 위시한 사정 기관은 그 본래의 임무와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권력 기관으로 변질된다. 행정 조직들은 근대적 관료제의 합리성에서 벗어나 권력자의 어떤 명령에도 비굴하게 엎드리는 전제국가의 종복 집단으로 퇴행했고, 이를 빌려 박근혜·최순실 집단은 엽기적인 전횡은 물론 구역질 날 정도의 재산을 쌓아 올렸다.

사법부 조직은 인선에서부터 권력 집단의 일부로 편입되며, 그나마 집요한 사찰과 감시의 대상이 된다. 정당은 민주주의적 합의의 사회 조직이라는 본래의 성격에서 벗어나 이러한 권력 집단의 전횡을 정당화하기 위해 범죄적 행각조차 서슴지 않는 방탄 집단이 되어, 사실상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의 ‘익찬회’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야당 또한 본연의 임무는 내팽개치고 지지율과 정치적 득실에만 몰각되는 기회주의적 집단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국가가 이렇게 굴러가면서 사회 전체도 무너진다. 언론 매체, 대학, 기업이라는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골간 조직들 또한 본래의 사회적 기능과 최소한의 원칙 등을 내팽개쳐버리고 노골적으로 스스로의 권력과 지대를 추구하는 엽기적인 범죄 조직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 모든 ‘비정상을 정상화’하고 헌정 질서의 회복을 가져온 극적인 계기는 다름 아닌 국민들의 직접 행동이었다.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시내로 나온 촛불 집회는 일제의 폭압에서 터져 나온 3·1만세 운동과 정확히 닮은꼴이다. 이제 국민들의 직접 행동은 헌법 전문에 잠깐 나오는 역사적 회고의 문구가 아니라 독일의 경우처럼 ‘저항권’으로 헌법에서 명시적으로 보장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식민 권력’ 체제를 일소하는 작업은 이제 막 시작되었고, 그 앞길은 결코 순탄하거나 금방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대통령 선거가 임박하였으니 당장 닥치게 될 결선투표제 등의 부분적 개헌 필요성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토록 깊게 병든 대한민국 국가 권력의 문제를 오로지 ‘87년 체제’나 ‘제왕적 대통령제’ 등의 문제로 환원하여 내각제니 이원집정부제니 하는 차원의 개헌으로 해결하려 드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지금의 권력 집단은 파란만장한 대한민국의 헌정사에서도 끝없는 변신으로 진화해 온 이들이다. 이런 식의 어설픈 개헌이라는 것은 그 집단이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 등의 허울을 쓰고 새로운 권력의 똬리에 들어앉는 또 하나의 변신 과정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지금은 이러한 권력 체제를 해체하는 작업에 집중하면서 그 체제가 과연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자세히 해부하고 조사할 때이다. 진정한 개헌은 그 뒤에 이루어지는 것이 옳다.

원글은 경향신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원글 보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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