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기본소득, 시민을 살아 있게 할 대안”

 

“협동사회주의 주장한 칼 폴라니의 딸 캐리 폴라니 레빗 방한 지독한 불평등 극복할 현실적 대안인 기본소득은 시민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

 

한겨레21 황예랑 기자 제1059호 2015년 4월 28일


 

칼 폴라니(1886~1964)의 유령이 맴돌고 있었다. 유령의 출몰 장소는 2012년 세계 각국의 총리, 장관, 대기업 최고경영자들이 세계경제를 걱정하며 머리를 맞대는 다보스포럼. 이게 다 2008년 불어닥친 세계 금융위기 탓이었다. 경제학자들은 1944년 쓰인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에 새삼 주목했다. 몇 년 새 한국어·중국어·아랍어 등 15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됐다. 딸은 아버지의 유령을 반겼다. “세계경제가 위기에 빠져들면서, 내 아버지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주제인 ‘사회 안에서 경제가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이 다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서양의 거듭남을 위하여: 에세이 1919~1958> 캐리 폴라니 레빗이 쓴 이탈리아어판 ‘서문에서)
저작 으로 유명한 정치경제학자 칼 폴라니의 딸인 캐리 폴라니 레빗 캐나다 맥길대 교수(경제)가 방한했다. 93살의 나이에도 레빗 교수는 4월24일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개소식과 22일 ‘기본소득 한국네트워크’와의 좌담회 등에서 열정적으로 아버지의 사상을 전했다. 정용일 기자
한국에 상륙한 칼 폴라니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15년, 다시 칼 폴라니의 유령이 맴돈다. 이번엔 한국에서다. 지난 4월24일 칼 폴라니의 학문적 성과를 이어받아 한국형 사회적 경제 발전모델을 만들겠다는 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캐나다 몬트리올에 있는 ‘칼 폴라니 정치경제연구소’의 아시아지부 격인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소장 정태인)다. 때맞춰 칼 폴라니의 저작도 잇따라 번역돼 출간됐다. <칼 폴라니 새로운 문명을 말하다>(원제 ‘서양의 거듭남을 위하여’)와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이다. 홍기빈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연구위원장이 2권 모두 번역했다.

칼 폴라니는 정치경제학자이자, 언론인, 교육자였다. 그는 자본주의 시장체제를 역사적으로 분석해, 자유시장경제 옹호론자들을 논박한다. 수요와 공급이 스스로 균형에 이른다는 이론은 머릿속의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는 ‘시장’에 복속되지 않으며, 자유시장경제에 맞서 사회가 ‘이중 운동’을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한다. ‘이중 운동’이란,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처럼 저항이 되기도 하지만 나치즘이나 파시즘처럼 반동이 되기도 한다.

“나의 아버지는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지식인들이 사회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유령은 그렇게 살아 있는 영혼과 만난다. 칼 폴라니의 사상을 가장 잘 이해하고 기억하는 딸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캐리 폴라니 레빗 캐나다 맥길대 교수(경제학)다.

레빗 교수는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개소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그는 아버지만큼이나 열정적인 사람이다. 방한 이후 4월17일 전라남도 구례 ‘구례자연드림파크’ 개장 1주년 기념 포럼, 22일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와의 좌담회, 23일 기자간담회, 24일 연구소 개소식 기조연설 등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냈다. 93살의 나이가 믿기지 않는 강행군이다. 레빗 교수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걷고, 몇 시간의 대화에도 막힘이 없었다. 숫자나 역사에 대한 기억력도 정확했다. 다만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글씨는 물론 사람의 얼굴도 흐릿하게 형체만 보일 뿐이다.

4월22~23일 만난 레빗 교수의 이야기를 묶어서 전한다. 레빗 교수는 기본소득운동의 열렬한 지지자다. 모든 사람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정기적으로 일정액의 수당을 지급하자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폭주를 막을 대안을 찾는 흐름은 여러 갈래로 나타나고 있다.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가 한 갈래라면, 기본소득운동은 또 다른 흐름이다.

조절 가능 상태 벗어난 불평등

레빗 교수는 격년으로 열리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 정기총회에 거의 매번 참석한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4월22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8층 회의실에서 ‘칼 폴라니에서 기본소득까지’라는 주제로 레빗 교수와의 좌담회를 열었다. 강남훈(한신대)·곽노완(서울시립대)·권정임(서울시립대) 교수, 윤자영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 등이 참석했다. <칼 폴라니 새로운 문명을 말하다>를 출간한 노동자협동조합 출판사 ‘착한책가게’ 전광철 이사장과 기본소득에 관심 있는 시민 등도 함께했다. 4월23일 기자간담회는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주최로 서울 정동 성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1시간30분가량 진행됐다.

왜 새삼스럽게 칼 폴라니가 다시 주목받고 있을까?

70년 전 쓰인 책이 의미 있게 읽히는 이유가 뭘까? 21세기, 지독한 시장 지배의 세상이 됐기 때문이다. 시장이 우리의 사회적 삶을 지배한다. 사회는 경제성장을 위해서만 복무하게 돼버렸다. 19세기 중반까지는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다. 그런데도 21세기 불평등이 19세기 중반보다 훨씬 심각하다. 경제 전체가 상위 소수의 부를 축적하는 메커니즘으로 전락했다. 금융자본이 암세포처럼 불어나서, 실제 생산이 일어나는 산업경제를 좀먹어들어가는 상황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우리는 이를 확인했다. 지난 30년 동안 미국과 유럽에서의 불평등 심화는 놀라울 정도였다. 더 이상 시장 조절이 가능한 상태가 아니다. 기술혁신을 통한 자본주의 체제의 생산성 향상은 상위 10% 내지는 1%의 극소수에게만 부를 안겨준다. 더불어 기계가 노동을 대체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실업 상태가 되는데도, 생산성 향상의 결실은 극소수에게만 돌아가는 것이다. 지독한 불평등, 환경파괴, 사회불안 등으로 21세기 문명이 완전히 붕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레빗 교수는 이같은 불평등을 완화할 대안이 ‘기본소득’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21세기 자본>을 쓴 토마 피케티 교수에 대한 비판적 의견도 밝혔다. “피케티는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는 상황을 바꾸기 위한 대안으로 자본세를 제시했다. 하지만 자본이나 기업의 힘이 굉장히 강한 상황에서 (자본세의) 현실화에 대해 (나는) 비관적이다. 기본소득이 불평등 완화, 재분배 차원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는 기본소득이 돈 없는 일부 계층에 대한 ‘적선’이 아니라 ‘시민권’이라고 강조했다. 정치적 해결책이기도 하다. “현재 생계를 위협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심각한 양극화 사회는 정치적으로도 위험하다. 기본소득은 결국 부의 재분배뿐만 아니라, 시민을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살아 있게 만드는 대안이 될 것이다.”

아버지인 칼 폴라니가 기본소득에 대해 직접 언급한 적은 없다. 그의 사회철학에 비춰볼 때, 기본소득으로 이어지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2010년 기본소득네트워크 총회에서 만난 브라질 상원의원이 “칼 폴라니가 살아 있다면 기본소득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란 질문을 던졌다. 그 뒤 아버지의 책을 다시 읽으면서 생각해봤다. 아버지도 지지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3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경제적 이유다. 빈곤층에게 일정 소득이 주어지면 이를 소비재에 지출할 것이고, 그건 결국 침체된 지역공동체의 부활로 연결된다. 둘째, 사회적 측면이다. 정의롭지 못한 불평등은 사회 통합을 저해한다. 기본소득은 지속 가능한 사회로 만들 수 있다. 셋째, 정치적 이유다. 기술이 고도로 진보된 사회에선 순응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아버지는 자유를 보호하려면 일반적 규범에 순응하지 않을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믿었다. 다수결 사회에서도 소수자가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순응하지 않고 살아가는 소수자인 시민활동가나 작가들에게 생존할 수 있는 기본소득을 준다면, 정치적 민주화에 기여할 수 있다.

4월24일 서울 은평구 불광동 서울혁신파크에 문을 연 ‘칼 폴라니(아래 작은 사진) 사회경제연구소’ 현판 제막식을 마친 뒤 박원순 서울시장과 캐리 폴라니 레빗 교수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레빗 교수는 “아직 출판되지 않은 아버지의 저작이 90여 편이나 남아 있다”고 말했다. 뉴시스, 한겨레

 
– 기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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