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인터뷰+]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새로운 형태의 경제를 모색해야”

 
 
[인터뷰+]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새로운 형태의 경제를 모색해야”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은 우리 학계에서 이색적인 경제학자다.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다호메이 왕국과 노예무역’, 심숀 비클러 등이 쓴 ‘권력 자본론’ 같은 주류 경제학계에서는 다소 이단적이라고 할만한 책을 꾸준히 번역하고 있다. 본인 역시 ‘살림 살이 경제학을 위하여’, ‘자본주의’와 같은 책을 저술했다. 끝모르게 치솟는 청년실업과 주택비용, 팍팍한 인생살이로 고달픈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그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지난 20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 찾아가 물어봤다.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린다.

“간단히 말하면 사회이론으로서 경제학을 하고 있다. 제 2차 세계 대전 이전의 경제학은 경제현상을 중심으로 사회를 어떻게 이해할까를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 이후 경제학은 수리모델을 세워 여러 경제변수간의 기술적 분석을 하는 연구로 영역이 좁아졌다. 하지만 20세기 전반기만 해도 경제학은 사회 전체가 경제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어떠한 문제에 부닥치고 어떠한 변화를 겪게 되는가를 포괄적으로 살피고 정책을 마련하는 학문이었다. 슘페터, 베블렌, 폴라니, 베버 같은 이들이 그런 종류의 경제학을 했던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역량이 부족해서 부끄럽지만, 나도 그러한 종류의 경제학 전통을 이어가려고 한다. 사회가 어떻게 스스로의 필요 욕구를 충족시키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에 놓고서 사회의 여러 현상과 변화를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실천의 방향과 방안을 마련해 낼 수 있는 사회 이론을 구성하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경제학자들처럼 수리모델을 세워 경제 변수들을 예측하거나 하는 좁은 의미의 경제 분석이 관심사는 아니다.”

 

 

-일반적인 경제학과는 다소 다른 경제학을 하고 있는데 이유는 무엇인가?

“학문적, 현실적 이유가 다 있었다. 우선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1학년 때 배운 경제원론의 내용을 도저히 과학이라고 납득할 수가 없었다. 크게 세 가지 의문이 있었다. 첫째, 욕망의 무한성에 근거한 희소성 명제이다. 나는 사람의 욕망이 무한하다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래서 교수에게 물었다. 욕망이 무한하다면 도대체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어떻게 성립하느냐고. 둘째는 생산함수였다. 생산함수 안에 들어가는 ‘자본(K)’의 개념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떡볶이집의 ‘자본’에는 고추장과 리어카가 다 들어갈 텐데 그 두 개를 합친 게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걸 또 측량한다고? 첫째에서 문제가 생기면 수요곡선이 나올 수 없고 둘째에서 문제가 생기면 공급곡선이 나올 수 없으니 나의 경제학 공부는 아예 초장부터 빗나가 버린 셈이었다.(웃음) 결정타는 세 번째였는데, ‘한계수입=한계비용’에서 가격이 결정된다는 부분에서 완전히 귀신에 홀린 느낌이었고, 교수님께 여쭈어 보았다. 도대체 이렇게 해서 가격을 결정하는 기업을 하나라도 보셨느냐고.

이런 질문을 할 경우 보통 대부분의 교수들은 ‘자네가 무얼 착각하고 있으니 다시 공부하게’라고 꾸짖었다. 그런데 그 중 한 교수님이 밀턴 프리드먼의 방법론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설명해 주셨다. 경제학의 여러 이론은 실제의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현상의 분석과 예측을 위해 쓸모 있는 모델을 구성하는 것이 목표라고. 따라서 지금 경제원론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하여 경제학을 열심히 배운 뒤 먼 훗날 실제 현실의 분석과 예측에 유용한지를 따져서 돌아보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는 것이었다. 훌륭한 학생이라면 이쯤 해 두었으면 얌전히 공부로 돌아갔어야 했는데, 나는 머리도 나쁘고 성격도 못 되먹은 학생이었는지라 (웃음), 그때부터 따져보기 시작했다. 과연 경제학자들은 그러면 예측과 분석에 얼마나 유능한가? 요즘에는 마치 새로운 사실인양 여러 사람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하지만, 현대경제학의 공식적 모델이라 할 동태확률일반균형 DSGE 모델이 실제 경제의 예측에서 무용지물이라는 것은 오래된 사실이다. 2008년 경제 위기 당시에 드러난 경제학자들의 무능력도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내린 결론은, 현대 경제학이라는 것이 ‘과학’은 고사하고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아 교수가 되는 것 말고는 실용적인 의미도 거의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학원은 정치학 쪽으로 옮겨 넓은 의미의 ‘정치경제학’(마르크스 경제학이 아니다)을 배우면서 수리 모델이 아닌 전통적인 사회과학/사회이론으로서의 경제학을 공부하기로 한 것이다.

현실적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한국 자본주의의 사회 경제적 모순 때문이었다. 내가 입학한 80년대는 아직도 살인적인 저임금이 노동자들의 삶을 짓누르고 있을 때였다. 이후 민주화와 노동조합의 조직화로 초기 개발 독재 시대 유형의 불평등은 완화되는 듯 했지만, 90년대 이후에는 모든 것을 자본 수익의 합리성에 따라 재조직한다는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면서 여러 사회 경제적 모순은 모습만 바꾼 채 나와 내 이웃들의 삶을 오늘날까지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현대 경제학은 ‘시장의 합리성’을 만병통치약으로 이야기할 뿐 사실상 침묵하거나 은폐해버리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우리들 삶에서 실제로 전개되는 우리의 경제 생활을 있는 그대로 보고 거기에서 어떤 실천적 방향을 찾기 위해서는 따라서 더더욱 앞에서 말한 ‘사회이론으로서의 경제학’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살림살이로서의 경제학을 주장하고 있다. 어떤 내용인가.

“경제라는 말에는 ‘살림살이’라는 말과 ‘돈벌이’라는 두 가지의 전혀 무관한 의미가 혼재되어 있다. 경제economy라는 말은 그리스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에서 왔는데, 이는 본래 ‘집안 살림’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경제란 사실상 ‘합리적 선택을 통하여 이익을 극대화하는 행위’를 뜻한다. 즉 전자는 ‘나와 우리의 좋은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을 조달하는 행위’이지만, 후자는 그냥 ‘화폐로 계산되는 바의 수익의 극대화와 축적’이다. 이 두 가지 종류의 경제가 전혀 다른 것이고 명쾌히 구별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바였지만, 오늘날에는 그러한 지혜가 사라지고 대부분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섞여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혼동이 벌어지게 된 이유는 그 역사적 배경이 되는 19세기와 20세기의 자본주의 및 산업혁명이라는 두 가지 조건에서 찾아야 한다. 첫째, 사람, 자연, 화폐까지 시장에서 돈을 주어야만 구할 수 있는 상품으로 변해 버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좋은 삶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조달’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돈을 벌어야’했다. 둘째, 20세기까지의 두 차례의 산업혁명은 주로 좁은 의미에서의 ‘물질적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데에 초점이 있었다. 이렇게 되면 화폐로 계산되는 바의 투입/산출의 개선이 바로 더 좋은 것들을 더 많이 조달하여 ‘좋은 삶’을 이루는 첩경으로 여겨졌다. 공산주의에서나 자본주의에서나 이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21세기의 환경은 이러한 혼동을 극복하고 다시 두 가지 의미의 경제를 구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첫째,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가 충족되고 난 다음에는 인간의 ‘좋은 삶’에 필요한 것들이라는 것이 도무지 시장에서 돈 주고 사올 수 있는 게 아닌 경우가 너무나 많아진다. 미세먼지 없는 공기는 어떤가? 여성들이 안심하고 밤늦게 다닐 수 있는 도시는 어떤가? 우리 아이들을 위한 이상적인 교육 내용과 시스템은 어떤가? 이런 것들을 제대로 조달하기 위해서는 ‘돈벌이’ 경제학이 아닌 ‘살림살이’ 경제학의 관점이 절실하다. 둘째, 산업혁명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이제 부가가치의 근원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던 50년대 대공장의 비용절감/대량생산이 아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확히 찾아내고 그것을 충족시킬 수단과 방법을 집단적으로 찾아내어 제대로 ‘조달’하는 것이며, 이는 이른바 ‘초연결성’이라는 패러다임의 등장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첫째, 나와 우리의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철저히 연구하고 고민해야 한다. 둘째, 거기에 필요한 구체적인 ‘현물’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한다. 셋째, (시장이건 국가건 그밖의 무엇이건) 그 ‘현물’을 조달할 수 있는 (도덕적으로나 비용적으로나)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이러한 ‘살림살이’ 경제학의 사고방식으로 무조건 ‘수익 극대화의 방법’만을 내세우는 기존의 경제학을 대체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주면 좋겠다. ‘살림살이 경제학’으로 경제 생활을 조직한다는 게 어떤 것인가.

“지금 국민적 고민이 된 노후 준비의 예를 들어보자. 다. 얼마나 돈을 재어둬야 충분할까? 한쌍의 부부가 30년 가까이 무위도식할 돈을 65세까지 마련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솔직히 이야기하자. 이건 미션 임파서블이다. 우리나라처럼 전체적으로 소득이 낮고 또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나라에서는 인구의 기껏 10퍼센트 정도나 꿈꿀 수 있는 일이다. 그러면 나머지 얼추 70퍼센트 정도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노후를 준비해야 할지 견적이 나오지 않게 마련이며, 이에 장수는 축복은 커녕 재앙이 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이건 세계 대부분의 산업국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이다. 또 이건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연금과 보험과 사회 지출 나아가 사회 구조 전체를 어떻게 개혁해야 하느냐는 거시적인 국가 개조의 문제로도 연결된다.

그렇다면 노후 준비의 문제를 ‘연금과 저축’이라는 돈벌이 경제학의 사고방식으로 보지말고 ‘좋은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을 조달한다’는 살림살이 경제학의 사고방식으로 한 번 보자. 먼저 찾아야 할 것은, 나의 ‘좋은 삶’이라는 것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나의 65세 이후의 구체적인 라이프 스타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이다. 예를 들어 나같이 책이나 읽고 살아온 사람이 65세 이후에 갑자기 골프장을 전전하는 삶을 원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조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답이 보이기 시작한다. 골프장 회원권은 필요 없다. 내가 모은 2만권의 책을 잘 보관하고 사용할 수 있는 지하 2층짜리 건물이 필요하다. 이걸 6개월 안에 조달해야 한다면 꼼짝없이 은행에서 대출받아 그 돈으로 짓거나 살 수밖에 없지만, 앞으로 시간이 20년 정도 남아 있다면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내가 목수일을 배워 직접 지을 수도 있고, 지방을 샅샅이 뒤져 괜찮은 폐가를 찾아 개조하는 방법도 있고, 뜻이 같은 이들과 주택 협동조합을 만드는 방법도 있다.

국가와 시스템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보고 연금 들라고 재촉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 인구의 2-30퍼센트를 차지하게 될 노령 인구의 ‘좋은 삶’ 그리고 나라 전체의 ‘좋은 삶’은 무엇인지를 따져보아 거기에 필요한 것을 집단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정치경제의 구조를 잘 설계하여 전체적으로 개조해 나갈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50대 이후의 사람들이 최소한 20년은 더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의료 시스템과 노동 시장을 바꾸어 나갈 방향이 무엇인지를 구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현 시점에서 전 지구적으로 볼 때 경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은 세대에 따라 세 가지 태도로 나뉜다. 전 물질주의, 물질주의, 포스트물질주의. 나라에 따라 시기는 다르지만, 2차 대전 이후 세계 경제가 고도성장기에 있을 때에는 사람들의 ‘좋은 삶’의 개념이 물질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쉽게 말해서 결혼해서 애도 둘 이상 낳고 집도 사고 평수도 불려나가고 차도 사고 계속 고급차로 업데이트하며 별장도 사고 해외 여행도 다니고 아이들 유학도 보내면서 노후 준비를 이룬다… 뭐 이런 꿈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와 연결된 소비 패턴과 여가의 패턴 그리고 다시 그와 연결된 문화적 삶의 틀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구조를 이루어 대략 지난 반세기 동안 자라난 물질주의 세대의 인생 주기에 대한 관점과 가치관을 결정하였다. 그런데 그보다 앞선 세대와 그 나중 세대는 이러한 물질주의에서 찍혀 나온 ‘좋은 삶’의 인생관과 가치관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경제의 고도성장이라는 것이 사실상 끝나버린 21세기의 상황의 산물임이 분명하다.

지금 마흔이 되지 않은 분들 중에서 물질주의 세대의 인생 주기와 생활 스타일을 그대로 답습할 수 있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인구의 구조로 보나 산업 발전의 방향으로 보나 폭발적인 물질적 팽창과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던 20세기 후반기는 오히려 예외적인 기간이 될 것이며, 기후 생태 위기와 인구 구조의 위기를 비롯한 각종 사회 경제적인 위기와 시스템 리스크가 최소한 앞으로 30년간은 계속될 것이다. 여기에서 젊은 세대는 물질주의 세대의 인생관 가치관가 단절하여, 지금의 상황과 조건에서 실현가능하고 더 진보된 새로운 ‘좋은 삶’의 모습을 구상해 내고 그에 맞추어 사회를 능동적으로 재구성해 나가기 시작해야 한다. 이런 일들은 이미 시작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바의 미국인들이란 자동차가 없이는 행복할 수 없는 이들이었는데, 지금 미국의 20대는 자동차의 소유와 스스로 운전하는 것에 대한 집착이 크게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한번 살림살이 경제학의 관점을 권유하고자 한다. 좋은 직장 잡아 재테크하고 돈벌어서 노후 준비하고 멋진 소비와 여가를 즐기는 생활을 위해서 인간 관계와 건강과 행복까지 모두 희생하고 불행해지는 희비극을 나는 도처에서 보고 있다. 젊은 세대에게 권하고 싶다.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나와 우리의 ‘좋은 삶’은 어떻게 되어야 하며 거기에 무엇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오라. 늙어가는 X86 세대와는 다른 인생 주기와 가치관을 만들어내라. 그리고 이를 위해 종적으로 단절하고 횡적으로 연대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회를 구상하고 만들어 내야 한다.”

 

2017. 10. 04

박현준 기자 hjunpar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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