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인의 경제시평] 김정은 위원장께

 

[정태인의 경제시평]김정은 위원장께

 
 

한반도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문재인 대통령의 한·미 군사훈련 연기 제안이 시발점이었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신년사에서 남북관계에 ‘사변적인 해’를 만들자고 화답한 얘기는 북·중 정상회담, 남북정상회담으로 실현됐고 이제 북·미 정상회담을 남겨 놓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김 위원장은 ‘핵·경제 병진 노선’을 완성했으니 이제 경제에 전념하겠노라고 선언했습니다.

[정태인의 경제시평]김정은 위원장께필경 전달되지 않을 편지를 지금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을 수 없는 통계(제발 공식 통계 좀 공개해 주세요!)와 ‘경제 연구’(북한의 경제 학술지), 그리고 북한 탈주민의 전언을 종합해 보면 북한 경제는 전통적인 ‘사회주의체제’에서 이미 많이 벗어났습니다. 무역을 통한 위로부터의 시장화, 주민들의 삶을 통한 아래로부터의 시장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으니까요. 세계의 학자들이 일컫는 대로 ‘이행경제’라고 부르든, 아니면 북한에서 명명한 것처럼 ‘우리식 사회주의’라고 부르든 그건 상관없습니다.

기우부터 털어 놓자면 국제금융기구나 주류 경제학자들이 권고하는 ‘빅뱅’식 개혁을 채택하면 절대로 안된다는 겁니다. 러시아 등의 빅뱅은 정치적 혼란 속에서 가격자유화, 민영화, 금융안정정책, 조세개혁을 단숨에 해치우려다 GDP가 30% 이상 줄어드는 장기 ‘이행 불황’을 초래했습니다. 이런 거대한 전환이 사회시스템과 사람들의 규범을 혼돈 속에 빠뜨린다는 사실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중국이나 베트남의 선택은 이와 달랐습니다. 기존 체제의 빠른 해체가 아니라 향진기업이나 경제특구를 통해 시장경제의 비중을 점진적으로 늘리는 전략이었죠. 그들은 기존 ‘경제관리체제의 개선’과 시장경제를 조화시키는 방법을 찾아냈고 그 과정에서 인민들 역시 시장경제의 원리를 체득했습니다.

시장경제의 경험이라는 면에서 북한은 1980년대 초·중반의 중국보다 훨씬 더 시장경제에 노출된 상태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인프라의 개·보수만 빨리 이뤄진다면 ‘동아시아의 기적’이 북한에서만 재현되지 않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북한체제에 단단히 틀어박힌 문제에 손을 대지 않을 수는 없을 겁니다. 제 보기에 세계 어느 사회주의국가보다도 오랫동안 정성을 기울인 ‘계획의 세밀화, 일원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회주의체제의 문제는 ‘연성 예산제약’(J 코르나이)에 있다기보다 ‘경성 생산제약’, 즉 극히 소수의 대상에서만 투입요소를 확보하도록 한 데 있습니다. 제 시간에 최고 품질의 자재가 도착하지 않는다면 어떤 기업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최종 결과는 실망스러울 테고 결국 최저 품질의 요소가 전체 생산물의 질을 결정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미 ‘물자교류시장’의 허용, 주문제나 계약제의 확대 등 현재 이 분야에서도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만 조금 더 과감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업이 투입요소를, 국내 시장은 물론 해외 시장에서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해서 모든 기업들이 경쟁에 나서게 해야 합니다. 시장경제의 장점은 바로 이렇게 국지적 정보가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처럼 단순히 ‘정치적, 도덕적 자극’을 강화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절대로 해결할 수 없을 겁니다.

또한 ‘주체’라는 이름이 붙은 기술체계 역시 과감히 손봐야 할 겁니다. ‘주체농법’ ‘주체철’ 등 기본 산업의 기술은 1950년대 북한의 비교우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즉 상대적으로 풍부했던 전기를 많이 사용하는 기술인데 이제 에너지는 북한의 취약 부문입니다. 김 위원장이 신기술 산업에서 강조하는 ‘최첨단 돌파’는 기존 산업에도 적용해야 합니다.

 제 능력으로 ‘거대한 전환’을 이 짧은 편지에 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역사상 최고 지성의 얘기를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남북한 모두 폴라니의 다원적 경제와 민주주의, 오스트롬의 ‘다중심 접근’을 택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국가(공공경제)와 시장, 그리고 공동체(사회적경제)가 민주주의에 의해 조화를 이루는 모델이죠. 조금 더 구체적인 경제전략을 찾으려면 조지프 스티글리츠(컬럼비아대)·대니 로드릭(하버드대) 교수, 그리고 중국 전문가로 A 왈더 교수(스탠퍼드대)를 추천합니다. 경제학이라는 안경을 벗고 맨눈으로 구체적인 현실에서 해법을 찾아온 학자들입니다.

 

아… 가장 중요한 돈 얘기를 안 했군요. 국제기구에 가입할 조건이 충족될 때까지 중국의 AIIB를 이용할 수 있을 테고 일본의 식민지 배상금(또는 경협자금)도 활용할 수 있겠죠. 미국 자본에 대한 의존은 트럼프 대통령도, 물론 김 위원장도 원하지 않을 겁니다.

금년이 경제 분야에서도 ‘사변의 해’로 기록되기를 바랍니다.

 
 

정태인 | 칼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소장

 
2018.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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