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좌파”인가?: 앤드류 양을 주목하라 I

* 이 글은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전반부가 나갑니다.

우리가 함께 우리가 원하는 유토피아를 함께 설계하고 함께 만들자는 것이 우리의 위키토피아의 프로젝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드시 걸리게 되어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념 혹은 이데올로기의 문제입니다. 우선 독자 여러분부터 이 글의 저자로 등장하고 있는 “우리들”이라는 자들의 이념적 성향에 대해 호기심 혹은 의구심을 가지실 것입니다. 요즘 통용되는 이념적 잣대로는 “진보냐 보수냐” 그리고 “좌파냐 우파냐”라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두 개의 이분법에 대해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사람들은 이 잣대를 놓고 보아 상대방이 자기의 반대쪽에 있다고 생각되면 그때부터 방어적 혹은 전투적 태도를 취하게 되며, 대화 대신 논쟁 혹은 무시와 냉소가 지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위키토피아는 나올 수 없습니다. 산업사회의 미래는 거기에 살고 있는 모두의 지혜와 관점과 정보와 지식을 최대한 아우를 때에만 순탄하게 모든 이들과 자연의 안녕을 보장하도록 작동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s://blog.apaonline.org

둘째,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미래를 파악하고 준비하는 논의를 그 이념 논쟁이 대체해 버린다는 점입니다. 우리들은 자신이 속한 진영의 이념적 세계관과 주요 주장들을 소리 높여 외치면서 이것을 준비하고 실현하는 것이 바로 미래라고 믿어버리기 일쑤입니다. 이러한 편향은 일반인들보다 오히려 많은 교육을 받고 사회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진 대단히 지적인 사람들일수록 더 심해지는 경향이 있어서 더욱 당혹스럽습니다. 그 결과 18세기의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이 꿈꾸었던 세상, 19세기의 칼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세상, 20세기의 하이에크가 꿈꾸었던 세상 등을 순도 높고 강도 높게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미래 프로젝트”라고 강변하는 것입니다. 18세기 말의 위기에도 “요순시대”를 실현하는 것을 꿈꾸었던 조선 지배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결과 미래도 사라지며 현재의 실정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작업도 사라집니다. 식상하고 진부한 이념 논쟁이 그 자리를 채워 버립니다.

따라서 위키토피아 논의를 더 해나가기 위해서는 꼭 따져 물어야 합니다. 진보는 좌파인가요? 보수는 우파인가요? 그렇다면 미래는 곧 진보의 편이니 자동적으로 좌파의 편이 되는 것인가요?

 

좌파: 용어 혼란의 역사

최소한 공산주의 진영이 몰락한 1990년대 이전의 사회 담론에서는 암묵적으로 진보 = 좌파라는 등식이 통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참으로 묘한 일이지만, 냉전기의 영국과 미국에서조차 역사의 다음 단계는 사회주의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그 이후로는 그러한 등식을 자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여기에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 요인이 있습니다. 진보라는 말도 그렇지만, 이 “좌파”라는 용어도 그 뜻이 너무나 모호하여 심지어 “좌파 이념이란 좌파 진영에 모인 이들이 생각하고 주장하는 모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지경이었기 때문입니다. 호지슨Geoffrey Hodgson의 저서[잘못된 방향 전환들: 좌파는 어떻게 길을 잃었나Wrong Turnings: How the Left Got Lost]는 이러한 이른바 좌파라는 말에 담긴 주장과 이념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터무니없이 다른 뜻으로 변해왔는가를 여지없이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이 말은 18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최소한 프랑스 계몽주의자들, 자코뱅 당파, 토머스 페인, 초기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자유지상주의, 문화적 상대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사실상 별 상관이 없는 다양한 입장을 지칭하는 용어로 춤추듯 변해왔음을 이야기합니다. 그의 주장을 반만 믿는다고 해도, 2019년 오늘날 좌파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이고 핵심이 무엇인지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만나기 힘든 것은 분명합니다. 노동해방인가요? 각종 소수자들과의 연대인가요? 반신자유주의인가요? 생태주의인가요? 복지 강화인가요? 반서구 혹은 친서구인가요? 모두 다 인가요? 아마 모두 다 일 것입니다. 우파나 좌파나 근대 산업사회가 태동한 18세기 이후 몇 백 년 동안 “왼쪽”과 “오른쪽”에서 나왔던 주의 주장들 어떤 것도 버리는 일 없이 거대한 꾸러미로 만들어 계속 질질 끌어왔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무 것도 버리지 못하게 하는 고집 센 할머니 때문에 이사를 거듭할 때마다 온갖 잡동사니를 다 끌고 다니면서 이삿짐만 커져가는 철수네 집처럼 말입니다.

여기에서 궁금함이 생겨납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진보 = 좌파라는 등식은 왜 생겨난 것일까요? 그 여러 복잡한 사정을 다 살펴볼 지면은 없지만, 여기에서 꼭 한 번 언급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진보”와 “좌파” 모두의 아버지뻘로 추앙되는 19세기 초 프랑스의 사상가 앙리 드 생-시몽Henri de Saint-Simon입니다.

 

생-시몽의 관점

생-시몽(1760-1825)은 인류의 운명이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한 최초의 사상가였을 뿐만 아니라, 산업사회가 어떻게 진화할 것이며 또 진화해야 하는가에 대해 누구보다도 뛰어난 혜안을 보여주었던 이였습니다. 우리의 위키토피아 논의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이인지라 나중에 보다 자세히 이야기할 것을 약속드리면서, 이번에는 지금 논의의 맥락과 관련된 부분만을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달랑베르나 루소와 같은 저명한 사상가들을 만나면서 열렬한 공화주의 혁명 사상을 품고 자라났으며, 청년기에는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모두 몸소 겪었던 그는 처음에는 당시의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과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에서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사회 변화의 물결이 프랑스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19세기 초부터 그는 완전히 새로운 사상을 내놓기 시작합니다. 카를 대제의 후손인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인 그에게 어느 날 꿈에 카를 대제가 나타나서 “나는 땅위에 제국을 세웠지만 너는 정신세계에 제국을 세울 것”이라는 계시를 내립니다. 그 꿈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생-시몽은 산업혁명을 계기로 하여 인류가 완전히 새로운 진화의 단계로 들어섰으며, 이에 완전히 새로운 학문 (“사회과학”)으로 완전히 새로운 정치를 (“권력을 해체하는 정치”) 일구어 “가장 가난하고 가장 숫자가 많은 계급”의 행복을 최우선 순위로 놓는 이상적인 사회 (“산업사회”)를 건설할 것을 제창합니다. 당시는 산업혁명이라는 어휘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대인들 중에는 그러한 변화가 현실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이들도 극히 드물었다는 점에서 볼 때 이는 실로 경천동지할만한 혜안입니다. “산업사회”를 위시하여 앞에서 따옴표를 쳐 놓은 용어들이 모두 생-시몽이 만들어 낸 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예전의 전통적 농경 사회는 자연의 순환에 따라 생산 활동이 저절로 규제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 사회를 규제하는 법칙은 종교와 형이상학에서 나왔으며, 정치란 극소수 왕과 귀족들이 권력을 다투는 파괴적인 게임이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산업사회”는 다릅니다. 생산의 주체는 기계가 되며 생산 활동의 조직 또한 공학적 합리성에 따라 이루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더 이상 종교와 형이상학을 따르지 않으며 오로지 과학적 이성만을 신봉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산업사회”는 이러한 공학적 합리성과 과학적 이성의 발전에 따라 그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빠르게 재조직되고 바뀌어 나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급변하는 “산업사회”의 현실을 항시적으로 조사하고 분석하는 “사회과학”이 필요하며, 그러한 과학적 사회 조사의 결론에 부합하도록 사회를 최소한의 갈등과 마찰로 바꾸어 나가는 새로운 유형의 정치로 기존의 권력 다툼의 정치를 대체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산업사회” 재구성에 있어서 절대로 우선시되어야 할 최고의 원칙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형제와 자매가 되어 사랑”할 수 있어야 하며, “가장 숫자가 많고 가장 가난한 계급의 행복”이 최우선으로 여겨지는 “새로운 기독교”가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에서 우리는 “진보”와 “좌파”의 사상이 불가분으로 하나가 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진보”란 모든 이념적 선입견을 벗어버리고 오로지 사회의 현실에 대한 과학적 파악이라는 하나의 원칙에 입각하여 인간 사회의 우애와 평등 그리고 산업의 효율성이 최대한 공존하며 살아나도록 사회를 계속 바꾸어 나가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형제와 자매들을 종으로 삼으려는 지배 계층의 낡은 권력과 그것을 구체화하는 여러 적폐의 제도들을 타파할 것이며, 모든 이들이 평등한 형제자매로서 넓은 의미의 산업 활동에 정신적으로 또 물질적으로 참여하게 만들 것이며, 그 과정에서 무산 계급의 행복과 안녕을 최우선으로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사상은 “진보”와 “좌파”의 교집합이지 결코 합집합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진보주의”에도 다양한 사상 조류가 있지만, 무산 계급의 고통과 희생을 담보로 한 진보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파우스트는 인류에게 이익을 줄 거대한 간척 공사를 진행하지만 그 과정에서 가난한 노부부의 오두막을 빼앗아 버리면서 죄의식으로 파멸해 버립니다. 이 대목에서 괴테가 생-시몽(주의자들)을 모델로 삼았다고 합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업사회”의 진보를 가져올 수도 없고 그래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개선시켜줄 수도 없는 종류의 급진주의자들을 그는 무척 혐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좌파”라는 말을 만들어 낸 프랑스 혁명 당시의 자코벵 산악당을 극도로 혐오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정권 교체는 권력을 쥔 지배자들을 부르주아로 바꾸는 전통적인 권력 다툼에 불과하며, 가난한 이들의 운명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매서운 비판이었습니다.

 

좌파는 더 이상 “쿨”하지 않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보”라는 것이 좁은 의미에서의 이념이라는 것과 전혀 무관한 것이라는 명확한 생각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산업사회”는 기술의 진보 그리고 과학의 발전과 함께 끊임없이 어디론가 변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방향을 과학적으로 읽어내어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하여 사회를 재구성해나가는 것이 진보입니다. 기술과 과학 그 자체는 사회가 나가야 할 대략의 방향과 그 가능성 한계의 테두리를 지을 뿐, 구체적으로 사회를 어떻게 재조직해야하는지의 세세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 내용은 우파 이념으로 채워질 수도 있고 좌파 이념으로 채워질 수도 있습니다. 극우라고 할 히틀러의 나치즘도 대단히 강력하게 작동하는 “산업사회”를 만들었고, 중도 우파라고 할 전후 독일의 기독교민주당 또한 대단히 성공적인 “사회적 시장 경제” 모델을 만들었고, 중도 좌파라고 할 스웨덴 사회민주당 또한 아주 성공적인 “북유럽 모델”을 만들었고, 극좌인 (혹은 보기에 따라 극우인) 스탈린 또한 연평균 20%의 경제성장률을 자랑하는 30년대의 소련 경제를 건설하였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좌파가 매력적인 존재가 되어 사회 전반에 있어서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헤게모니”를 쥐었던 것은 좌파가 이러한 “산업사회”의 “진보”라는 과제에 대해 아주 설득력 있는 답을 제시하였던 시대뿐이었다는 것입니다. 2차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대공장 체제가 처음 성립하던 19세기 말의 생디컬리즘과 마르크스주의가 그러했으며, 자유방임 시장 경제의 파탄으로 온 사회가 도탄에 빠졌던 1930년대의 다종다기한 (사회주의적) 계획 경제론이 그러했으며, 2차 대전이 끝난 후 효과적인 경제 개발의 청사진을 간절히 요구했던 제 3세계 국가에서의 “민족민주혁명론”과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이 그러했습니다. 결국 19세말에서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케케묵은 자유방임 시장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의회민주주의를 신주단지처럼 붙잡고 늘어진 우파나 자유주의자들에 비교해 볼 때, 설득력 있는 사회과학과 파격적인 대안을 앞세운 좌파는 항상 앞에서 말한 의미에서의 “진보”의 과제를 선점하는 세력으로 보였습니다. 여기에서 진보 = 좌파라는 20세기의 통념이 생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념적 담론 구도는 1980년대 이후가 되면서 완전히 역전됩니다. 산업 기술의 변화와 경제 환경의 변화를 내걸면서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를 새롭게 제시하는 역할은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깃발을 치켜든 우파에게로 넘어가 버립니다. 좌파는 이러한 담론의 “비도덕성”과 “비인간성”을 고발하면서 70년대 이전 조직 노동이 중심이 되는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로 되돌아갈 것을 계속해서 호소합니다. 이에 지긋지긋한 “국가냐 시장이냐”는 답 없는 이분법이 이념적 담론 영역을 지배하게 됩니다. 혹자는 이를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하지만, 좌파 스스로가 바로 그렇게 운동장을 기울인 것이라는 이야기는 잘 하지 않습니다. 산업 기술의 변화를 앞세워서 생산과 분배를 어떻게 조직할 것이며 여기에 적합한 문화적 도덕적 삶의 방식을 무엇인가에 대해 구체적인 답을 제시하는 쪽이 무조건 이기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 시대의 현실입니다. 1980년대 이후 이 과제에 도전한 좌파 세력이 얼마나 될까요? 게으른 좌파 세력은 날이 갈수록 비만증에 걸렸고, 이에 시소가 기울어지면서 운동장이 바뀐 것입니다.

1990년대가 되면 좌파 = 진보의 등식은 완전히 깨지게 되었습니다. 미래를 선도하는 세력은 MBA 출신의 CEO들과 투자자들, 그리고 이들을 받쳐주고 대변하는 변호사들과 관료들이 되었습니다. 2008년까지의 세상입니다. 그런데 2008년 경제 위기로 진보 = 신자유주의적 “개혁” 우파라는 등식도 깨지게 됩니다.

 

(다음 편에 계속)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