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화폐의 탄생

북한 주민들은 이미 화폐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아가고 있는 듯 보인다. 화폐는 주민들의 사고와 감정과 의지를 변화시키고 있다. 나아가 권력으로 작동하여 사회적 관계를 재구성하고 있다. 
1. 서막 – 수령공동체의 쇠락
1990년대 중반, 경제 위기 이전까지의 북한경제시스템은 수령 중심의 공동체였다. ‘사회주의 대가정’이라는 구호가 이를 보여준다. 이것은 가부장제의 전 사회적 확대를 의미한다. 북한에서 수령과 인민, 인민과 인민은 감정적 일체성과 인격적 통일성을 이루는 운명공동체였다. 수령공동체는 자원과 노동력을 배분하고, 사회적 생산물을 인민들에게 재분배함으로서 항상성을 유지했다. 계획과 명령은 절대적 과업으로 주어졌다. 노동자에게는 정치ㆍ도덕적 각성제가 지속적으로 주입되었다. 혁명적 군중 노선과 각종 캠페인이 쉴 새 없이 전개되었다. 수령은 인민 대중이 분투하는 현장에 나타나 ‘교시’하고, 주민들은 이것을 썩지 않을 석판에 새겨 걸었다. 그들은 이러한 것들이 자본주의 경제 활동의 근본 동력인 ‘이기심’을 대체한다고 믿었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구축하기 시작한 이 공동체는 두 가지의 모듈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독특한 경제관리체계이다. 북한의 경제관리체계는 매우 복잡하지만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생산의 완전계획화’, ‘소비의 배급제’, ‘무역의 국가독점’이다. 수령공동체의 또 다른 모듈은 공동체의 주민 모두에게 주입된 ‘도덕 경제’(moral economy) 이데올로기이다. 도덕 경제는 시장이 아닌 ‘호혜’나 ‘재분배’로 자원을 배분한다.
이러한 수령공동체는 1990년대 초반까지는 강고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리는 경제 위기는 공동체를 흔들었다. 아사자들이 발생하고,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국경을 넘는 주민이 속출했다. 1990년대의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기존 체제의 경제적 토대는 거의 완전하게 와해되었다. ‘생산의 완전계획화’, ‘소비의 배급제’, ‘무역의 국가독점’ 이라는 3대 원칙은 모두 무너졌다. 그런데도 북한 체제는 놀라운 내구성을 보였다. 수령공동체를 떠받치는 다른 하나의 모듈인 ‘사회주의 도덕’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오랜 사고의 관성이라 할 수 있는 ‘문화 지체’(cultural lag)가 북한의 내부 파열을 막은 것이다. 급속한 이탈과 혼란이 발생하였지만, 그로 인한 체제 붕괴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혀 내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북한의 내적 작동시스템에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북한은 거대한 격랑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경제 영역에서 기존의 수령공동체는 사실상 와해되었다. 물적 토대는 파괴되었고 집단주의 도덕도 점점 소구력을 잃고 있다. 북한의 수령공동체는 새로운 물질적, 문화적 토대를 재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원동력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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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phan) –  North Korea — Pyongyang, Kim Il-sung SquareCC BY-SA 2.0Link
2. 변화의 중심, ‘화폐’

이 글에서는 북한 변화의 숨은 동인(動因)으로 화폐를 주목한다. 변화의 중심에 ‘화폐’가 있다. 또한 화폐의 움직임을 추동하는 ‘돈주’가 있다. 그러나 화폐의 작동은 은폐되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떠들썩한 흥정을 동반하는 시장이 북한 변화의 주범으로 회자되지만, 흥정이 끝나고 드러나지 않게 주고받는 현금 관계가 핵심이다. 화폐도 시장과 같이 ‘사회제도’이다. 그러나 시장보다 원초적이다. 시장과 화폐는 분리된 것은 아니다. 시장이 세포라면 화폐는 원형질이다. 시장이 식물이라면 화폐는 생장점이다. 북한 경제 현상의 변화를 화폐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화폐라는 프리즘을 통해 북한 사회의 변화를 보다 구조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북한의 시장에서 성립되는 가격에는 노동 가치의 흔적이 지워졌다. 그저 화폐단위에 부여된 숫자를 종이쪽에 쓱쓱 써서 가격표라고 달아놓고 교환의 수단으로 삼을 뿐이다. 공동체의 연대와 호혜를 위해 존속했던 국정 가격체계는 거의 무너졌다. 차디찬 현금 관계가 기존의 공동체를 잠식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은 이미 화폐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아가고 있는 듯 보인다. 화폐는 주민들의 사고와 감정과 의지를 변화시키고 있다. 나아가 권력으로 작동하여 사회적 관계를 재구성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통찰한 바와 같이 화폐는 머지않아 강고한 기존의 통치 질서까지 넘볼 것이다. 그는 말한다.
화폐 그 자체가 공동체가 아닌 곳에서는 화폐가 공동체를 해체해야 한다.
3. 혼종 체제와 돈주
이 글은 북한의 경제 사회적 변화를 ‘시장’ 요소의 확장으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시장과 더불어 ‘화폐화’ 또는 ‘화폐경제’의 확산을 통해 수령공동체의 변화를 설명한다. 화폐를 하나의 ‘공동체’ 혹은 ‘인간관계’라고 주장한다면, 무척 생소하게 느낄 것이다. 하지만 화폐는 분명히 특정한 인간관계를 지시하며, 그렇지 않은 인간관계에 대해 파괴적 영향을 미친다.
1990년대의 ‘고난의 행군’ 이후, 수령공동체는 새로운 가치관의 파상적인 공격을 받고 있다. 공동체주의는 개인주의로부터, 수령절대주의는 공리주의로부터 정치ㆍ도덕적 자극은 물질적 자극으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다. 이것은 수령공동체를 대신하여 화폐가 사회적 상호작용의 매개로 작동하는 현실에서 드러나고 있다. 화폐는 단순히 교환수단 정도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화폐가 공동체와 사회주의적 가치관을 해체하는 경향 때문에, 북한은 집요하게 화폐의 기능을 약화시키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죽은 듯했던 화폐는 어느새 기능을 되살리고 영역을 확장했다. 급기야 2009년에는 주민들의 수중에서 화폐를 몰수하는 조치까지 취했다. 급진적인 화폐화에 대한 두려움과 그로 인한 지배 권력의 잠식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화폐적 관계의 확장은 거부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물적 토대를 상실한 ‘수령공동체’와 권력이 된 ‘화폐’는 적대적 공존의 관계가 되었다. 남은 것은 화폐가 거미처럼 자아내는 사회적 관계와 수령공동체가 화학적 결합을 도모하는 길 뿐이다. 바야흐로 북한은 화폐의 힘을 의식적이고, 사회적으로, 매우 정교하게 통제해야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북한의 화폐경제 확산은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혼종’ 시스템을 형성시키고 있다. 그 단서는 북한 시장의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다수의 학자들은 북한의 시장을 ‘자생적 시장’으로 규정한다. 이와 다른 시각이 있다 하더라도 거의 ‘자본주의적 시장’을 잣대로 들이대서 북한의 시장화를 평가하고 있다. 북한의 시장이 자본주의적 시장으로 발전할 것으로 전망한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북한의 시장이 자생적으로 출발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후의 발전과정을 구체적으로 추적해 보면, 북한 시장화의 현실을 적절히 설명할 수 없다. 현실적으로 북한의 시장은 자본주의적 시장이 아닌 관료들에 의해 조정되고 통제되는 시장이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7.1조치 이후 매우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북한의 시장은 또 다른 형태의 ‘배급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시장이 자본주의적이라기 보다 ‘관료적 시장’으로 발전해 왔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현실적 증거로 인해 명백하다.
‘관료적 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북한의 ‘혼종 체제’의 한쪽에 돈주가 있다. 화폐는 작은 사물이다. 그러나 작은 화폐의 배후에는 거대한 사회적 관계가 숨어있다. 돈주의 활약상을 통해 개인과 사회의 유기적 관계를 전체적(holistic)으로 조망하고, 얻어진 통찰을 전개하여 남북화해와 협력의 방안을 이끌어 내는 것, 이 글이 지극히 바라는 것이다.
4. 1947년, 화폐의 탄생
북한의 현실을 바라보기에 앞서 북한 화폐제도를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1947년 12월 5일 북한에서 발행되는 모든 신문에 일제히 북조선인민위원회의 결정서가 발표되었다. 화폐교환에 대한 법령이었다. 북한 최초의 중앙은행권은 모스크바의 소련 지폐 발행감독국에서 극비리에 인쇄, 운송되었고 북조선중앙은행의 본ㆍ지점에 준비되어 있었다. 1947년 12월 6일부터 12일까지 신화폐는 전격적으로 구화폐와 교환되었다. 김일성이 주장한 화폐개혁의 명분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장의 경제적 보호이다. 둘째, 산업과 상업의 발전 보장이다. 셋째, 비료를 비롯한 각종 물자의 생산과 국가재산을 늘리기 위해서이다. 넷째, 모리간상배들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다섯째, 인민경제계획 실행을 재정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인민들의 경제 생활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경제 토대를 튼튼한 기초 위에 올려 세우며 앞으로 수립될 통일적인 중앙정부의 재정금융 토대를 축성”하려는 것이다.
【표 1-1】 화폐 교환의 원칙
  1. 국가기관, 기업소, 정당, 사회단체 및 소비조합 : 보유현금 전액을 예금시키게 하고 북조선 인민위원회에서 결정한 한도 내에서 1947년 12월 13일부터 지불
  2. 1세대 단위로 세대주는 500원, 만 18세 이상의 동거가족 1인은 200원까지 교환
  3. 국영직장(국가기관, 정당, 사회단체 및 각종 기업소)에 근무하는 사무원과 노동자 및 생활상 국가 보조를 받는 자들은 1947년 11월 봉급과 동액까지 교환(가족 제외)
  4. 노동자, 사무원 10명 이상을 고용하는 민간기업소 및 민간단체의 교환액 : 1947년 11월 지불임금의 50%를 넘지 못함
  5. 노동자, 사무원 10명 이하를 고용하는 민간기업가, 수공업자, 소상인 및 자유직업자 : 사업소득세 또는 자유 소득세의 과세표준액 1개월분의 반액까지 교환
  6. 농민 : 현물세를 납부한 농가에 한하여 매 호당 700원까지 교환
  7.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 : 500원씩 교환
  8. 전문학교학생 및 대학생 : 1개월 국가장학금 지급액
※ 출처 : 리원경, 『사회주의 화폐제도』(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86), p. 275에서 발췌 요약.
화폐 개혁의 의도가 선언적 수사(修辭)에만 있는 것이 아님은 세부적 내용에서 엿볼 수 있다. 신ㆍ구화폐의 교환 비율은 1:1로 결정되었으나 【표 1-1】에서 보듯 직업과 소유 형태에 따라 교환 한도에 차별을 두었다. 1947년 12월 12일까지 교환하지 않거나 예금하지 않은 화폐는 무효화되었다. 교환 한도를 초과하는 돈을 사실상 몰수한 것이다. 적대 계층의 경제적 기반을 와해시켜 제압하려는 의도였다. 더불어 김일성은 권력 기반을 공고하게 다져 나갔다.
화폐 개혁의 결과 북한 주민들이 회부한 구화폐 71억 2,271만 4,000엔 중 35%만이 교환되었다. 65%인 46억 1,471만 3,000엔은 동결되었고 그만큼의 몰수를 의미했다. 주민집단별 손익은 【그림 1-1】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림 1-1】 1947년 화폐개혁시 주민집단 간 화폐교환 비율

※ 주 : 상공업자Ⅰ은 10명이상의 노동자사무원을 고용하는 경우, 상공업자Ⅱ는 10명이하를 고용하는 경우, 기타는 분류외 주민집단임
※ 출처 : 전현수(1996), p. 207의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
주민들의 대응에 온도 차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노동자ㆍ사무원, 농민 등 근로계층은 화폐 개혁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회부한 구화폐의 70% 내외를 신화폐로 교환받은 그들이야말로 화폐 개혁의 수혜자라 할 수 있었다. 화폐 개혁으로 크게 손실을 본 주민 집단은 10명 이상의 노동자 사무원을 고용하던 상공업자와 종교인이었다. 상공업자Ⅰ(10명 이상 노동자 사무원 고용)은 회부한 구화폐의 21%만 교환할 수 있었고 79%가 사실상의 몰수인 동결처분을 받았다. 상인들은 화폐 교환에 매우 비협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보유한 화폐를 실물로 전환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가격 담합을 통해 물가 폭등을 시도하기도 했다. 한편, 유산 계층과 종교인들도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특히 종교인들은 회부한 구화폐의 92%가 동결되어 화폐 개혁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되었다. 개신교 목사와 장로들은 화폐교환 보이콧을 선동하는 전단 살포와 집단적 거부 움직임을 조직했다. 일제 강점기 북한 지역은 개신교 교세가 강성했고 종교 지도자들은 주로 유산 계층에 속했다. 그들은 해방 이후 토지 개혁을 필두로 전개된 일련의 민주개혁으로 입지가 급속히 축소되고 있었다. 화폐 개혁은 마지막으로 남은 경제적 기반의 와해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저항은 필연적이었다. 화폐개혁 직후 김일성은 상인과 개신교인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모리간상배들과 악질적 장로, 목사들에 대하여 경각성을 높여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작년 12월 화폐 교환에서 손해를 본 사람은 로동자, 농민, 사무원들 가운데는 없습니다. 다만 모리간상배들만이 손해를 입었기 때문에 이들은 여기에 대하여 불평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리고 반동적인 장로, 목사로서 땅을 안 가졌던 자가 거의 없고 놀고 먹지 않은 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도 우리에게 불평을 품고 있습니다.
김일성, “모든 힘을 민주기지의 강화와 조국의 통일독립을 위하여(1948.3.29)”
화폐 개혁의 결과, 통화량은 극적으로 감소했다. 주민들 사이에 퇴장되어 있던 유휴 화폐는 공적인 영역으로 환수되었다. 교환 한도의 설정과 차별적 예금 인출이 낳은 결과였다. 유통화폐는 1948년 1월 1일을 기준으로 화폐 교환 전보다 67% 감소했다. 유통 화폐량 저하는 물가 하락으로 이어졌다. 화폐 개혁 전의 고질적인 인플레이션은 치유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공산품을 중심으로 물가는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공급 증가가 따르지 않는, 통화량 감소만을 통한 물가 하락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림 1-2】 1947년 화폐개혁이후 평균시장물가 하락률(단위 : %)

※ 출처 : 전현수, “1947년 12월 북한의 화폐개혁”,『역사와 현실』(한국역사연구회, 1996), p. 211을 참조하여 작성.
북한 연구자들은 화폐 개혁의 위상을 ‘민주개혁’의 일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유일화폐제도를 수립하고 자주적 재정금융의 토대를 만들었으며 물가를 잡아 주민들의 생활수준을 고무적으로 높였던 계기로 화폐개혁을 꼽고 있다. ‘8ㆍ15 해방 3주년기념 평양시 경축대회에서 한 보고’에서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1947년 말에 실시한 화폐 개혁을 통하여 식료품의 가격은 20∼40% 낮아졌으며 우리는 얼마 전에 또다시 전반적인 상품의 가격을 대폭 인하하였습니다. 이것은 로동자, 사무원들을 비롯한 인민들의 물질문화 생활수준을 더한층 향상시켰습니다. 인민들의 물질문화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산업복구를 위한 투쟁에서 커다란 성과를 이룩함으로써 북조선에서는 실업자가 완전히 없어졌을 뿐 아니라 오히려 로동력의 부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로동자, 사무원들은 지난날 일제가 소유하였던 주택과 건물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들의 로임은 계속 높아지고 있습니다. 화폐 개혁과 물가 인하를 통하여 상품의 가격이 대폭적으로 낮아진 사실을 고려한다면 로동자, 사무원들의 실질로임은 훨씬 더 높아진 것으로 됩니다.
북한연구자들은 “토지개혁, 산업국유화에 이은 화폐 개혁으로 노동자와 농민들이 지주와 친일세력의 착취와 억압에서 해방”되었음을 강조한다. 화폐 개혁은 해방 이후 연명해오던 구조선은행권을 폐절시켜 식민지의 모반(母斑)을 지우고 통화 주권을 확보했다. 1947년 12월은 토지개혁을 시작으로 전개된 민주개혁의 정점이 되었다. 북조선중앙은행은 북한 전역에서 유일한 발권은행이 되었다. 또한 발행되는 화폐는 강제 통용력을 가진 법화가 되었다. 공화국 유일 화폐의 성립은 김일성에게 더욱 공고한 기반이 더해짐을 의미했다.
민영기 / 동국대학교 외래교수, 북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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