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칼 폴라니인가?

 

1930년대의 대공황과 파시즘, 전쟁은 수많은 경제학의 천재를 탄생시켰습니다. 케인즈, 하이예크, 슘페터, 그리고 폴라니가 그들입니다. 어쩌면 어마어마하게 절망적인 상황이, 다른 시대라면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할 사람들을 천재로 만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속적인 대규모 실업의 이유를 총수요 부족에서 찾은 케인즈의 경제학이 전후 30년을 지배했습니다. 1971년엔 닉슨이 “나도 케인즈주의자”라고 선언할 정도였죠. 하지만 (포스트) 케인지언 방법론에 고유한 사회적 합의에 따른 경제조정은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하이예크의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프리드만은 그의 사상에 구체적인 정책체계를 얹었고 시카고학파의 합리적 기대가설은 경제학을 평정하게 되죠. 네오케인지언, 뉴케인지언들은 1980년대 말에 사실상 완전 항복합니다(맨큐가 대표적이고 스티글리츠나 크루그만은 네오 케인지언 중 주류 내의 반대자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시장에 모든 걸 맡기면 자동적으로 균형이 이뤄질 것이라는 신념(바로 줄푸세죠), 그리고 중앙은행이 기준 금리를 조정해서 ‘대순항’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2008년 금융위기로 붕괴했습니다.

폴라니는 다원적 경제론을 주장했습니다. 상호성, 교환, 재분배라는 세 개의 통합모델이 공존해 왔다는 거죠. 제 용어로 말하면, 사회적 경제, 시장경제, 공공경제의 조화입니다. ‘자기조정 시장경제’란 어떤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라 국가가 노동과 토지, 돈을 상품화한 과정이었습니다(이게 “거대한 전환”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사회를 시장의 원리로 일원화하면 붕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혼란에 대응하는 운동이 나타나게 마련이죠(이중운동).

2009년에 저는 이제 “폴라니의 시대”라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우선 폴라니의 사상은 비결정론적입니다. 시장경제 역시 사회에 의해 규제되는, 경제민주화의 이론입니다. 물론 사회적경제의 이론적 기초도 제공했죠.

1950년대부터 폴라니는 역사와 인류학에 전념했습니다. 따라서 포스트케인지언이나 통화주의와 같은 정책 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 연구소는 폴라니의 사상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것뿐만 아니라 폴라니의 사상에 기초한 다원적 경제발전론도 제시하려고 합니다. 포스트케인지언 경제학, 제도주의와 생태주의, 여성주의, 물론 맑스를 비롯한 고전파 경제학을 총동원해서 새로운 정책체계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포스트케인지언의 “소득주도성장”은 그 시작입니다. 다원적이며 비결정론적인 세계, 인간의 여러 속성과 교류방식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 경제가 다시 사회의 통제를 받는 세상을 꿈꾸는 분들이라면 KPIA의 조합원이 되어주십시오!

 

정태인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장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