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그리스 사태와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

반전과 충격이 계속되는 그리스 사태는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 질서의 근간에 미묘한 그리고 심각한 균열이 생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90년대 들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패권 아래에서 재편된 새로운 세계 질서는 대략 두 가지의 조직 원리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이른바 ‘지구적 협치’였다. 이는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다자주의와 민주주의의 원리에 입각해 광범위한 시민들이 참여하는 초국가적 민주주의를 수립한다는 것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군사력을 중심으로 해 유럽과 아시아의 안보공조 체제를 가동해 러시아와 중국을 적절하게 견제하는 군사적인 기능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둘째, 이러한 사회·경제적 조직 원리로서의 이른바 ‘시장 경제’였다. 지구적 금융 및 자본 시장을 중심으로 해 전 세계의 인적·물적 자원의 자유로운 이동과 조직을 최대한 허용함으로써 번영과 발전을 꾀한다는 것이었다.

유럽 통합 프로젝트는 이 두 가지의 원리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었다. 하나 된 유럽을 건설하자는 유럽인들의 오랜 이상을 실현하는 프로젝트이기도 했지만, 이는 또한 동유럽 국가들을 아우르고 우크라이나 및 터키와의 관계를 강화해 러시아 및 중동 지역에까지 영향력을 뻗치는 중요한 지정학적 세력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유로존이라는 단일 통화 공동체의 설계도는 재정통합 없이 통화만을 통합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통화주의 화폐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잘되어 나갈 때는 이러한 이면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자유와 연대가 실현되는 공동체로서의 유럽연합을 자랑하였고, 졸지에 유로라는 강력한 세계 통화를 가지게 되면서 경제적인 번영도 구가하는 듯보였다.

이미 지난 몇 년간 그리스를 필두로 터져 나온 유럽의 재정 위기는 우선 그러한 통화주의 화폐 이론과 유로화의 설계도가 얼마나 비현실적인 환상이었는가를 낱낱이 보여준 바 있다. 지난 며칠간 숨 가쁘게 진행된 그리스 사태에서 나타난바, 이제 유로존이란 독일의 일방적인 경제적 패권과 그 경제적 요구가 거의 폭력적으로 관철되는 틀에 불과하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사람들을 경악시켰던 것은, 같은 회원국에 불과한 독일의 재무장관이 노골적으로 그리스를 유로존에서 축출할 것을 공언했던 점, 그리고 이를 통해 관철시킨 굴욕적인 협상안이 사실상 그리스의 경제적 주권을 박탈해버리는 극단적인 것이라는 점이었다. 유럽인의 연대와 민주적 공동체라는 유럽 프로젝트 본래의 이상은 간데없고, 즉물적인 금융의 논리와 일국 이기주의의 논리, 그리고 어느새 강대국의 위치를 회복해버린 유럽 내 독일의 패권뿐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유럽 통합 프로젝트의 미래가 대단히 어두워졌고 사실상 끝나버린 게 아니냐는 극단적인 비관론을 피력하고 있다.

그 다음의 반전은 바로 국제통화기금(IMF)이다. 독일과 유럽 측이 스스로의 손실을 감수하고 그리스에 대해 상당한 양의 채무 탕감을 해주지 않는다면 자신들은 ‘지속될 수 없는 채무’에 돈을 꾸어줄 수 없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를 미국 정부의 입장이 간접적으로 전달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미 1947년에 있었던 미국의 마셜 플랜에서 보듯 그리스는 유라시아 서부 지역의 지정학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거점이며, 나아가 유럽 통합의 흐름이 와해되거나 힘을 잃게 될 때의 지정학적 리스크는 실로 중차대한 것일 수밖에 없으므로 미국은 이러한 독일 주도의 폭력적인 행태에 제동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1947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스스로 돈을 내는 대신 유럽의 은행들에 ‘게임값’을 물렸다는 것뿐.

그리스는 작은 나라이지만 이 나라를 둘러싼 사태의 전개는 이렇게 지난 사반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세계 질서의 구성 원리가 근간에서부터 미묘하게 균열과 모순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제 누가 우리를 막을 것인가’라며 승승장구하던 1990년대식의 신자유주의 담론은 분명히 옛날이야기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 대신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더욱 큰 혼란과 갈등의 시대일지도 모른다.

이 힘든 시련의 한복판에 서게 된 그리스인들이 지혜롭게 스스로의 길을 뚫어나갈 것을 응원하고 염원한다.

홍기빈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연구위원장

원글은 경향신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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