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은 길’을 가야 할 때

“‘선한 마음으로 나서면 하늘이 도우리라’는 믿음과 더불어, 이상과 같이 조정 조항 및 그 제안의 이유에 대한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이하 조정위)의 조정권고안, 마지막 문장이다.

딱 세 명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위원장:김지형 전 대법관, 위원:정강자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초빙교수·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기나긴 이름이 말하듯 ‘삼성 직업병’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07년 영동고속도로 싸리재, 아버지의 택시 안에서 숨을 거둔 황유미씨의 소망은 ‘조정권고안’에 오롯이 담겼다. 얼마나 오랜 시간 우여곡절을 겪었는가. 엄청난 수술비에 짓눌린 아버지에게 단돈 500만원으로 문제를 덮으려던 삼성에, 8년 만인 2015년 조정위의 권고안이 배달됐다.

“삼성이 하면 뭐가 달라도 다르다”를 실천하려면

2015년 현재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에 제보된 삼성 관련 피해 제보자는 200명을 넘어섰다. 사망자 수가 늘어나는 만큼 가족들의 싸움도 한 걸음씩 나아갔다. 2011년 법원이 고 황유미씨와 이숙영씨의 백혈병을 산업재해로 인정한다는 선고를 했고, 2012년에는 정부가 ‘반도체 공장에서 유해물질 수백 종이 사용되며 백혈병 등을 유발하는 발암물질이 제2 부산물로 발생한다’고 인정했다. 이때부터 삼성은 가족과 반올림이 요구한 ‘법정 바깥의 대화’에 응했고, 2013년 12월부터 사과·보상·재발방지 대책 등 세 가지를 의제로 교섭이 시작되었다.

2014년 영화 <또 하나의 약속>과 <탐욕의 제국>이 개봉되어 시민들의 눈물과 분노를 자아냈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병세는 악화됐다. 그해 5월14일 삼성전자의 권오현 부회장은 “삼성전자가 성장하기까지 수많은 직원들의 노고와 헌신이 있었고… (중략) 이분들과 가족의 아픔과 어려움에 대해 저희가 소홀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중략)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라고 밝혔다. 7년 만의 반전이었다.

권고안은 이 발표를 집어서 “삼성전자가 세계 초일류 기업의 위상에 걸맞은 정도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고 애쓴다. (중략) 보상 문제뿐 아니라 사과와 대책을 의제로 삼아 교섭을 진행하였다(111쪽)”라고 상찬함으로써 이번 권고안의 의미가 ‘사회적 해결’에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못박았다. 권고안이 제1장을 ‘공익법인의 설립과 운영’(2~4쪽)으로 삼고, 뒤이어 2장에서 보상을 다룬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공익법인은, 산업재해라는 사회적 질환을 해결하기 위한 핵심 제도 장치다. 만일 현재의 삼성 주장대로 이 부분이 빠진다면, 죽은 사람들과 산 사람들이 함께 쌓은 지난 8년간의 역사는 의미를 잃는다.

반면 명실상부한 공익법인을 세우는 순간, 삼성은 한국 경제의 새로운 단계를 선도하게 될 것이다. 어디 반도체 산업뿐이랴. 한국 사회는 모든 산업 분야에서 경쟁력을 이유로 노동자들의 건강, 시민의 안전을 외면해왔고 이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른 산업에도 유사한 공익법인이 출현하고 결국 국가의 제도와 결합될 때 한국에서도 이른바 ‘창조경제’가 가능해질 것이다. 회사가 정한 규칙에 따라 죽음의 노동을 하는 노동자에게서 창조성을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삼성은 이미 과거의 추격자가 아니다. 이제 어떤 목표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전략을 고집한다면 중국에 추월당할 것이다. 추격자 중국은 삼성보다 돈과 인재가 더 많고 더 일사불란하기 때문이다. 하여 ‘이재용의 삼성’은 “마누라 빼고 다 바꿔야 한다”라던 1993년 이건희의 삼성보다 더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추격자가 아니라 선도자로, 수직 계열이 아니라 수평적 협력 체제로, 법의 파괴자가 아니라 존중자로, 동네 골목상권의 약탈자가 아니라 수호자로 거듭나지 않으면 삼성은 공룡처럼 사멸할 것이다. 창조자가 되려면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하부 조직이 수평적 네트워크를 이뤄야 한다. 힘으로 사회의 승인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규범을 지킴으로써 사회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삼성은 진정으로 ‘가지 않은 길’을 가야 할 때가 되었다. 상상해보라. <또 하나의 약속> 엔드크레디트에 후원자 8075명의 이름이 올라가듯, 전 국민이 마음으로 후원하는 삼성의 모습을. 이제 삼성은 조정위가 보낸 ‘또 하나의 약속’을 받아들여야 한다.

정태인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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