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인 칼럼] 위기를 부채질하고 장기화하는 정부

 

마르크스주의 위기, 케인스주의 위기, 피셔 위기

숫자와 도표가 가득 차 있어 재미없는 글, 따분한 자료를 시원하게 꿰뚫어 핵심을 짚어주지도 못하는 ‘뷰’를 계속 읽어온 분들은 “참을성 짱”인 조합원이 틀림없습니다. 그 분들이라면 눈치 챘을 겁니다. 제가 요즘 ‘장기 침체’라는 용어 (저는 2009년 세계 경제 위기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한 뒤,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계속 사용했습니다) 대신 ‘위기’라는 낱말을 많이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을 진정한 학자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감’에 의해 미래를 예측하는 일을 비웃습니다. ‘점성술사’나 하는 일이라는 거죠. 역대 경제학자 중 최고의 현실 감각을 지니고 있던 존 메이너드 케인스도 “5년 뒤의 영국 경제”를 맞추는 일은 “확률 관계 0″라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무딘 감각과 케케묵은 통계, 더구나 구시대의 모델로 ‘과학적인’ 엉터리 예측을 하는 건 죄악이요, 그게 무서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직무 유기, 또는 무능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요즘 제 ‘느낌’은 세계 경제의 장기 침체 속에서 한국 경제가 수렁에 깊이 빠져 들어, 공황(패닉) 상태로 급전직하할 수도 있고, 서서히 침몰할지라도 심각한 사회 불안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겁니다. 더 나쁜 건 우리 모두 체념해 버리는 겁니다. “헬 조선”을 바꾸려 하는 게 아니라 탈출을 꾀하거나 그도 안 돼서 집 안에, 자기 안에 틀어박히는 상태가 되는 거죠. 최악입니다.

해서 모델이나 수치로 ‘증명’하는 건 불가능할지라도 이번 주에는 위기의 논리적 가능성을 짚어 놓으려고 합니다. 세간의 선입견과 달리 제가 이렇게 위기를 말하는 건, 30년 가까운 현상분석의 이력에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외환 위기 전후 4년 동안은 외국에 있었습니다).

경제학에 위기론은 많이 있습니다. 카를 마르크스주의의 과잉 생산 이론, 케인스의 유효 수요 부족이론, 어빙 피셔의 부채-디플레이션 이론, 하이먼 민스키의 금융 불안정 이론 등을 들 수 있겠죠. 하나의 거대한 현상을 각각, 생산, 수요, 금융 측면에서 바라 본 것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폴 새뮤얼슨이 “과잉 생산과 과소 소비가 뭐가 다른가?”라고 물은 것처럼 각 이론이 강조하는 바는 서로 얽혀 있는 현상입니다.

다만 어느 측면을 보느냐에 따라 모델이 달라질 것이고 따라서 해결책도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겠죠. 예컨대 케인스는 국가가 복지를 통해 소비를 늘리거나 인프라 건설을 통해 투자를 증가시킬 수 있으므로, 총수요 관리만 제대로 하면 자신의 손자 시대에는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으리라고 자신했죠. 반면 마르크스는, 과잉 생산이란 자본가들이 살아남기 위해 투자를 늘린 결과이기 때문에 미리 막을 방법이 없고 단지 공황에 의해 “폭력적으로 조정”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겠죠.

어느 쪽이 본질인가를 제쳐두고 이들 위기론의 준거 현상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면 실제로 위기가 발발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우선, 과잉 생산 위기는 중국의 경기 침체와 함께 현실화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발발한 세계 금융 위기는 2010년 유럽의 재정 위기로 번졌고, 그 동안 세계 경제를 이끌어 왔던 중국 등 신흥 경제의 위기로 확대됐습니다.

지난 뷰에서 얘기했듯이 저는 중국이 ‘경착륙’할 거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성장률이 5%까지 떨어질 것은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워낙 덩치가 큰 경제이기 때문에 세계의 각 경제 주체는 중국 경제가 확실히 회복된다는 믿음이 생길 때까지 투자나 소비의 모든 행동을 멈추게 될 겁니다. 해서 석유 등 원자재 가격이 떨어지면서 원자재를 수출하는 신흥 경제는 이미 위기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중국과 동남아에 전체 수출의 40% 이상을 의존하는 한국의 제조업 역시 몸살을 앓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철강, 석유 화학 산업이 문제가 될 겁니다. 해외 수요 부진에 따라 이미 위기에 허덕이는 조선 산업, 정부의 온갖 정책으로 약간 숨을 돌린 건설 산업에 이어 한국 ‘중후장대형’ 중화학 공업들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될 겁니다.

이번 국정 감사에서 새정치민주연합 홍종학 의원이 제시한 다음 표는 “범 4대 재벌을 제외한 여타 재벌의 경우 셋 중 하나는 (잠재) 부실 상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아래 관련 기사를 보십시오). 여기에 더해서 철강과 석유 화학 대기업의 수치까지 빨갛게 변하는 표를 상상해 보십시오. (☞관련 기사 : “현대·동부·한진 등 구조조정 시급”)

두 번째, 케인스주의의 위기입니다. 박근혜 정부의 단기 경제 정책은 건설 경기 부양 정책이 알파요, 오메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온갖 부동산 규제 완화에 이어 임대 주택 건설, 그리고 백두대간에 테마파크 건설하기 까지 있을 수 있는 모든 정책을 내 놓은 거죠. 아래 기사가 미리 보여주듯, “서민 주거 안정 대책”으로 내 놓은 민간 임대 주택도 결국 분양 시장 활성화 정책으로 판명날 겁니다. (☞관련 기사 : 임대 주택 꼼수에 혈세 줄줄 샜다)

중장기 정책 기조로 정부는 ‘경제 혁신 3개년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재벌의 서비스 산업 진출의 문을 연 겁니다. 각종 민영화 정책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경제 혁신’의 대단원은 최근 “노사정 타협”으로 일단락된 ‘노동 개혁’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제 경제 민주화와 4대 개혁을 일단락했으니 내년(2016년)부터 성장률이 치솟을 거라고 믿고 있을 테고, 현실이 이 백일몽을 부정하면 임기를 마칠 때까지 국회 탓만 할 겁니다.

일부 학자들은 박근혜 정부의 정책을 케인스적이라고 규정합니다만, 규제 완화나 노동 개혁은 전형적인 공급 사이드 정책입니다. 금융 규제를 완화해서 부동산 수요를 부추긴 정책들을 케인스주의에 속한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죠.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박근혜 정부 정책의 핵심은 “기업들이 원하는 건 다 들어주자” 입니다. 그래서 잡종 정책이 나온 거죠(잡종이 나쁘다는 건 전혀 아닙니다).

과거에 한국의 공급 사이드 정책이 먹힐 수 있었던 건 해외 수요가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외환 위기 때가 대표적이죠. 원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당시 ‘IT 호황’을 누리고 있었던 미국 등을 향한 수출이 두 자릿수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반대 상황입니다. ‘일반 해고’와 ‘취업 규칙 변경’을 활용해서 기업이 “뼈를 깎는 구조 조정”을 하면 할수록, 경제는 더 나빠집니다. 대량 해고와 소비 축소로 인해 국내 수요마저 급격하게 줄어들 테니까요. 기업의 ‘국제 경쟁력’이 강화될수록(세계 경제가 획기적으로 회복되지 않는 한) 오히려 경제는 더 나빠지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아래 기사를 읽으면 이번 ‘타협’에서 정부와 재계가 무엇을 목표로 했는지 읽을 수 있을 겁니다. (☞관련 기사 : 노동 개혁 합의 핵심 내용은?)

외환 위기 때를 떠올리면서 ‘노사 대타협’을 찬양하고, 이어서 국회도 화답하라고 보수 언론들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이는 만큼, 그들의 ‘경제적 문맹’도 한껏 드러나고 있습니다. 총수요가 부족한 시점에 오히려 현재의 미미한 수요마저 줄이겠다는 거니까요.

정부도 소비가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부자들 밖에 소비할 여력이 없다는 겁니다. 해서 “상속·증여세 최고세율은 5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 고령화 진전으로 구조적인 소비 부진이 우려되고 있는 상황에서 젊은 세대로의 부의 이전이 필요하다”는 발상까지 나오게 된 거겠죠. (☞관련 기사 : “부의 이전 필요” 상속·증여세 인하 논란)

하지만 저소득층의 복지를 위해 쓸 세금은 더욱 줄어들 테고 고소득층의 소비 성향이 낮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소비는 더욱 감소할 겁니다. 부의 불평등이 전체 소비를 줄인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죠. 어떻게든 성장률을 끌어 올리려는 정부의 근시안이 더욱 위기를 부추기는 거죠.

세 번째는 피셔의 부채-디플레이션 위기, 그리고 민스키 시점(Minsky moment)의 도래입니다. 1929년 대공황 발발 일주일 전에 “지금은 주식을 사야할 때”라고 말하는 바람에, 미국 최고 경제학자로서의 명성에 똥칠을 한 피셔가 자기반성으로 내놓은 이론이 부채-디플레이션이론입니다.

버티고 버티다 원리금 상환을 위해 주식이나 부동산을 팔려고 내 놓으면 가격이 폭락할 테고 이에 따라 다시 부채 상환의 부담이 더 커지는 현상이죠. 이런 현상을 기업 부채까지 확대해서 체계화한 것이 민스키의 금융 불안정 이론입니다. 최근의 “대차대조표 불황” 이론도 유사합니다. 민스키 시점이란 위기가 발발하는 때를 말하는 겁니다.

이미 가계 부채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얘긴 여러 번 했습니다. 특히 최경환 부총리의 부동산 경기 부양책은 중산층이 “돈 빌려 집사라”는 말을 실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이 정부 들어 가계 부채의 증가 속도는 소득 증가 속도의 두 배에 이르렀죠. 시간이 갈수록 문제 해결은 더 어려워진다는 얘깁니다.

물론 남아도는 돈을 통해 계속 부동산 가격 상승에 대한 희망을 계속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민스키 시점을 뒤로 미룰 수 있고, 세계 경제의 호황에 힘입어 소득의 증가 속도가 부채 증가속도를 앞지르게 된다면 문제가 사라질 수도 있겠죠.

저도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만 현재 상황으로 봐선 가능성 제로의 희망입니다. 시작은 준재벌급 기업의 파산일 겁니다. 어쩌면 외환 위기 때처럼 반도체 가격 하락이나 자동차 수출의 급감부터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자산 가격의 폭락이 먼저 올 수도 있고, 정부가 “선제적 구조 조정”을 한다며 노동 개혁을 한 것이 화근일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금 한국 경제는 심지와 도화선이 여러 가닥으로 연결된 대형 폭탄 위에 놓여 있습니다. 또 인화성 물질은 나라 안팎에 가득 차 있죠. 어디서건 심지에 불이 붙으면 다른 도화선으로 옮겨 붙어서 결국 폭탄이 터질 겁니다.

 

‘뷰’와 ‘데자뷔’

앞으로의 ‘뷰’는 우선 위기의 징후를 포착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겁니다. 하지만 반대 방향이 옳다고 정부와 기업(그리고 경제학자들)이 믿고 있는 한, 우리의 노력은 부질없는 일이 되겠죠. 해서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도 앞으로 고민하려고 합니다.

과연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자기 조직의 금전적 이익 때문에(아래 기사를 보시죠), 또 이렇다 할 대안도 갖지 않은 채 들러리를 선 한국노총을 비판해 봐야 우리의 앞날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관련 기사 : 박근혜 정부, 한국노총 ‘돈줄’ 쥐고 흔들었다)

과연 민주노총은 “무늬만 총파업”을 뛰어 넘어 ‘임박한 위기’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까요? 외환위기 발발 한 해 전, 1996년 말의 상황은 여러 모로 ‘데자뷔’입니다. (☞관련 기사 : 총파업 부른 노동법 개악)

위기가 눈앞에 닥쳐왔는데도 집안싸움에 몰두하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이 당이 과연 최소한 오바마의 노동 개혁(아래 기사를 보십시오) 정도라도 관철시킬 각오로 국회 안에서 노동법 개악을 둘러싼 싸움을 할 수 있을까요? 동시에 길거리에 나서는 것도 절체절명의 해법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관련 기사 : 99%를 위하여…’오바마의 노동 개혁’은 달랐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 가을, 같이 고민하고 답을 찾아내야 할 화두입니다.

 

정태인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

원글은 프레시안 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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