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또 하나의 기울어진 운동장

“청년 일자리를 위하여 임금피크제를!”이라는 취지의 새누리당 플래카드가 곳곳에 붙어 있다. 이러한 주장이 경제적으로 어떠한 논리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지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정치적 수사로서의 효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청년세대와 장년·노년세대라는 사회적 대립 구도를 창출하고자 하는 기획을 담고 있으며, 이 기획이 성공할 경우 향후 몇 십년간 또 하나의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지금의 젊은 세대가 고립될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다.

임금피크제를 시행한다고 해서 반드시 청년 고용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며, 임금피크제를 놓고 목소리를 높일 만큼 정년을 꼬박 채우는 것이 가능한 사람의 숫자도 많지 않다. 그런데 굳이 그 둘을 엮어 정치적 구호로 내놓는 것은 장기간 고용이 보장된 소수의 사람들을 찍어 장년층의 대표 집단으로 삼아 청년들의 답답한 고용 현실과 극적으로 대비시켜 결국 세대 간 대립 구도를 만들어내겠다는 정치적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

이는 현실화될 가능성도 높다. 청년들은 사회적·경제적으로도 중·장년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지만 문화적·감성적으로도 큰 거리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혐오와 반목의 잠재적 감정을 자극해 득을 보려는 진보 쪽의 논객이나 정치인들이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이다. 자칫하면 이 ‘헬조선’의 운명은 젊은이들이 힘을 합쳐 온갖 기득권을 다 움켜쥔 저 ‘개저씨’들을 몰아내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는 식의 정서로 악화될 수 있다.

함정이다. 1992년 대선·총선 이후의 한국 정치는 이른바 ‘민주화’ 세력을 호남과 수도권 일부로 고립시키고, 영남을 중심으로 전국의 보수 지배세력이 하나로 뭉치는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대립 구조에 지배당해왔다.

이를 지역 대립 구도라고 표현하지만, 그 본질은 사실상 진보 개혁 세력의 지역적 고립에 있다. 호남과 수도권을 제외한 다른 지역들은 사실상 보수 지배층의 정치적 텃밭이 되었고, 여기에서 유의미한 진보적·개혁적 정치세력을 일구어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거나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득표수로 직결되는 인구의 수라든가 그 밖의 사회적·경제적 자원이라는 점에서 볼 때도 이러한 대립 구도는 진보 개혁 세력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기상천외한 정치공학을 통해 두 번의 집권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심지어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기간에도 여당은 오롯이 여당이 아니었으며 선거 때마다 정권의 정치적 기반은 불안하게 흔들리기만 했다. 이러한 ‘기울어진 운동장’의 틀이 지난 몇 십년간 전혀 변하지 않고 한국 정치를 결정하고 있다. 선거마다 승승장구하는 새누리당의 힘뿐만 아니라 허리 부러진 당나귀마냥 힘을 못 쓰고 시들어가는 새정치민주연합의 내분의 구조 또한 모두 이러한 구조의 산물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지금 모든 면에서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이 지역 구도 대신 특정 정치세력에게 유리하게 작동할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어줄 새로운 대립 구도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옛날의 지역 구도와 마찬가지로 이 세대 대립 구도 또한 인구의 숫자와 사회적·경제적 자원의 편중이라는 점에서 압도적으로 ‘기울어져’ 있음은 너무나 분명하다. 청년세대는 이를 꼭 기억해야 한다. 우선 우리나라의 끔찍한 노인빈곤율에서 보듯, 그러한 대립 구도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다. 지금의 한국 현실에서 숨막히는 삶의 고통에 노출된 이들은 어느 세대에나 편재하며 그것도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꾸 청년세대를 호명하는 척하면서 그 세대를 그 다수와 갈라놓고 ‘게토화’시키려고 한다면 선택은 분명하다. 청년세대는 스스로를 그 다수의 일부로 자리매김하면서 다수 전체의 바람과 희망을 공유해야 한다. 보수나 진보 할 것 없이, 기성 지식인이나 청년 논객 할 것 없이 지금의 청년들을 뭔가 구별지어 특별하게 다루어주는 듯한 각종 형태의 ‘청년 담론’들을 즐비하게 내놓고 있다. 이것들을 조심하라. 답은 ‘다수화 전략’에 있다.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홍기빈 연구위원장

원글은 경향신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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