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에도 국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위기 시 잠적과 위기 후 국가 해체를 되풀이하고 있다. 단 하나, 국정교과서 만이 예외였다. 외환위기 이래 최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제위기는 어떻게 해야 하나.

지난해 11월7일은 세월호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날이다. 4월16일 세월호가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허망하게 가라앉은 후, 1년6개월이 훌쩍 지나갔다. 우리는 지난해 여름,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결코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올해 여름 메르스 사태는 또 한번 “국가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라는 의구심을 불러왔다.

국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국가의 수반이라는 대통령은 위기 때마다 잠적했다가 아우성이 수그러들 때면 ‘국가 대개조’나 ‘혁신’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그가 수행한 일이라곤 결국 국가의 해체였다. 국민들의 눈물이 채 마르지도 않았을 때 그는 크루즈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선박 규제 완화를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선령을 높이고 불법 증축을 눈감고 엉터리 선박 감독을 한 것이 세월호 사태의 분명한 원인들이 아닌가? 그런데 또다시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니….

메르스 사태도 마찬가지다. 6월11일 정두련 삼성서울병원 감염내과 과장은 국회의원 앞에서 “(삼성서울병원이 뚫린 게 아니라) 국가가 뚫린 것이다”라고 맞받아쳤다. 이 말은 물론 삼성병원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전적으로 틀린 얘기도 아니었다. 방역은 결단코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 혹여 그 시스템의 일부를 민간에 맡겼을 때는 철저히 규제해야 한다. 삼성서울병원에서 무더기 감염이 예견될 때, 5월30일 열네 번째 환자의 확진 판정이 나왔을 때도 방역 당국은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채, 삼성에 자체 방역을 맡겼다. 심지어 보름이나 지나 대책본부가 마련된 뒤에도 대통령의 한마디로 민간 전문가(의사)가 방역 총지휘를 맡았다. 도대체 국가는 왜 존재하는 것일까?

메르스 사태가 한창 진행될 때 정부는 세월호의 진상 규명을 막기 위해서도 안간힘을 다했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놓고 힘겨루기를 하다 가족들의 양보로 11월에야 법이 통과됐지만, 이번에는 시행령이 문제였다. 결국 특조위를 공무원이 좌지우지할 수 있도록 만든 정부 시행령이 공포된 것이 5월11일이었다. 그리고 예산이 지급된 것은 8월18일이었는데 내년 예산은 요구안의 31%만 책정된 상태다. 선체 인양 시기는 내년 여름 이후라는데, 특조위는 6월에 마쳐야 한다.

특조위 예산의 핵심인 ‘인양 선체 정밀조사’ 예산은 전액 삭감되었고 대신 해양수산부가 ‘인양 선체 관리’ 예산을 쓰겠다고 한다. 현재 세월호의 진상 조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체라는 핵심 증거물을, 있는 그대로 조사하는 것일 테다. 그런데 정부는 범죄 현장을 피의자가 감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한결같이 진상을 은폐하고, 국회는 해양 카지노를 허용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국가 대개조’요 ‘혁신’이다.

지도자가 실천해야 할 헌법 제34조 6항의 ‘실종’

위기 때의 지도자는 호주머니 속 뾰족한 송곳처럼 나타났다. 메르스 사태 때 박원순 시장의 6월5일 심야 기자회견이 없었으면 과연 어땠을까? 정부는 6월7일에야 메르스가 발생한 24개 병원과 환자들 동선을 공개했다. 그제야 병·의원과 국민들은 메르스 전파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었고 전염은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다. 자칫 참사로 이어질 뻔한 상주터널 사건에서 아이들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도, 박 시장과 조희연 서울교육감이 소방관을 수학여행 버스에 동승하게 했기 때문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박원순 서울시장은 선제적 조치로 정부의 메르스 감염 병원 공개 등을 이끌어냈다는 평을 받았다.
ⓒ연합뉴스

박원순 서울시장은 선제적 조치로 정부의 메르스 감염 병원 공개 등을 이끌어냈다는 평을 받았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박원순 서울시장(오른쪽)과 조희연 교육감이 17일 오전 서울 중구 광희초등학교 정문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의 발열 검사를 하고 있다. 2015.6.17
ⓒ연합뉴스

박원순 서울시장(오른쪽)과 조희연 교육감이 17일 오전 서울 중구 광희초등학교 정문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의 발열 검사를 하고 있다. 2015.6.17

모름지기 위기 시의 지도자는 “국가가 재해를 예방하고 국민 보호에 노력해야 한다”라는 헌법 제34조 6항을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위기 시의 잠적과 위기 후의 국가 해체’를 되풀이하고 있다. 아니, 그는 딱 하나 스스로 위기라고 진단한 사태에만 국가를 전면에 내세웠다. 11월3일,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은 중학교 ‘역사’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발행한다고 확정 고시했다. 박정희의 일생이 친일과 변절 그리고 독재 그대로 역사에 남는 것이야말로 박 대통령 유일의 위기인 모양이다.

지금 한국 경제는 외환위기 이래 최대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 경제의 버팀목이던 중국 경제의 성장률이 떨어진 게 직접적 원인이지만, 지난 3년간 ‘경제혁신=규제 완화’와 ‘빚내서 집 사고 전세금 올려주라’는 정책으로 일관해서 빈부격차가 극심해진 것 역시 장기적인 침체로 이어지도록 하고 있다. 과연 박 대통령은 앞으로의 경제위기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까? 뜬금없는 국정교과서 사태로 울컥 짜증이  솟아오르지만, 말 그대로 ‘헬조선’이 될지도 모를 내년을 생각하면 그보다 더 심한 공포가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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