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프레시안 뷰] 그리스 위기의 정치경제학

그리스는 어디로?

열흘 전, 그리스의 치프라스 총리는 “무조건 항복”이라고 할 만한 타협안을 내놓았습니다. 거기엔 그리스 자산의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화, 사회지출 삭감 등등 전통적인 IMF ‘구조개혁’ 프로그램이 가득 차 있을 뿐 아니라 이를 실천하기 위해 제정된 법은 되돌릴 수 없고, 새로운 정책은 IMF나 채권단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등 공공연하게 주권을 훼손하는 조항도 들어 있습니다.

그리스 국민투표의 결과인 “오히(No)”를 배반한 겁니다. 그리스 국민들은 무엇보다도 “더 이상의 긴축정책은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경제학적으로 보아도 합리적인, 어쩌면 유일한 해법을 지지한 겁니다. 더 강한 긴축은 그리스의 총수요를 줄여서 그리스 경제를 깊은 침체의 수렁에 빠뜨릴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니까요.

이후의 여론조사를 보면 70%의 응답자는 동시에 유로존에 남아 있기를 원했습니다. 긴축을 완화하면서 유로존에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답은 “그렇다”입니다. 이 둘을 양립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채무재조정, 즉 부채 탕감입니다. 아르헨티나 사태 때처럼 어떤 금융기법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본질은 상당 액수의 빚을 깎아 주는 겁니다. 그래야 그리스 국민들의 생활수준도 높아지고 동시에 빚을 갚을 가능성도 생깁니다.

하지만 치프라스 총리는 무릎을 꿇었고, 국내외의 보수 언론은 메르켈 독일 총리의 결단을 예찬하기 바빴습니다. 우리 보수언론들은 고집 센 여성 총리를 유난히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영국 대처 총리에 대한 열광 또한 그랬으니까요.

이 항복문서를 집행할 국내 개혁입법안도 그리스 의회를 무난히 통과했습니다. 집권 정당인 시리자의 일부 의원과 극우 황금새벽당이 반대했습니다만, 과거의 여당인 ‘중도좌파’ 정당들이 찬성표를 던졌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치프라스 총리의 지지율은 60%를 넘어 야당 정치가들의 인기를 10% 포인트 가량 앞서고 있습니다. 그리스 국민들은 자존심을 적당히 회복하고 유로존 탈퇴(“그렉시트”)라는 엄청난 모험을 피한 데 대해 안도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물론 치프라스 총리는 정권의 유지라는 목적을 달성한 거죠(이제 위기를 불러온 그리스 지배계급에 대한 ‘진정한 개혁’이 가능해졌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대반전이 벌어진 걸까요? 우선 우리 언론들의 상찬하는 바대로 독일의 옹고집을 들 수 있습니다. 이른바 “선 구조개혁, 후 채무협상”입니다. 치프라스의 항복 선언 이전에 이뤄진 바루파키스 전 재무부 장관의 인터뷰는 그 동안의 협상에서 독일, 또는 채권단(유로그룹)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바로 가기)

한 마디로 바루파키스는 협상장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겁니다. 무슨 얘기를 해도, 어떤 논리를 내세워도 그들의 답은 포괄적인 ‘구조 개혁안’에 먼저 서명하라는 거였죠. 몇 가지 합의할 수 있는 개혁안(세금 등)을 먼저 시행하면서 나머지를 논의하자는 제안도 물론 통하지 않았습니다.

실로 이 협상 게임은 기묘한 모습이었습니다. 양쪽 다 그렉시트로 상대를 위협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리스 쪽에선 금융시스템이 이미 마비된 상태였고 독일 쪽에선 ‘게으른 베짱이의 응징’이 국내에서 가장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이런 불균형을 깨려면 그리스의 “그렉시트” 위협이 믿을 만하다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이 게임이 치킨게임이라는 걸 기억하시나요?). 하지만 인터뷰를 보면 바루파키스 측근의 4,5명이 대책을 논의했을 뿐, 정부 차원의 대안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바루파키스는 이후 치프라스의 항복 문서를 “제2의 베르사이유 협약”이라고 맹공했습니다만, 인터뷰를 할 때 이미 이런 결과를 예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미련 없이 사임했었던 건지도 모르죠.

유럽의 꿈은 어디로?

많은 경제학자들이 지지한 “유로존 잔류와 부채 탕감”이라는 해법은 물 건너갔습니다. 독일의 결정은 다분히 정치적인 것, 또는 전략적인 것이었습니다. 메르켈보다 더 완고한 것으로 알려진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통독 당시 서독 측 협상대표였다고 합니다. 쇼이블레는 협상 조건이 가혹할수록 동독 지역의 수많은 자산을 헐값으로 인수할 수 있다는 걸 이미 체험한 사람입니다. 또 바늘 끝 같은 틈도 없이 상대의 말을 무시하는 전략은 자신의 인기를 끌어올리는 데도 효과적입니다.

나아가서 바루파키스는 그리스와 유사한 처지에 있는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대표들이 가장 적대적이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리스가 유리한 협정을 이끌어 낸다면 이들 나라의 현재 집권세력은 바로 실각할 테니까요. 독일 쪽에선 스페인의 포데모스당이 제2의 시리자가 되고, 연이어 ‘남쪽’에서 도미노 현상이 벌어지는 게 가장 두려웠을 겁니다.

그래서 아주 엉뚱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지난 30년 간 이른바 “IMF 조건”(IMF Conditionality, 구제금융을 받기 위한 조건)을 강요해서 전 세계에 신자유주의(바로 박근혜 대통령의 ‘줄푸세’)를 전파해온 IMF가 현재의 협상안에 반대하고 나선 겁니다. IMF는 채권단이 1) 상당한 규모의 부채탕감, 2) 30년의 지불유예, 3) 매년의 보조금 등 세 가지 중 택일하지 않으면 구제금융에서 빠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물론 이들 세 수단의 조합도 가능하겠죠.

치프라스 총리는 막판 협상에서 IMF가 빠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오히려 IMF가 그리스 국민의 편이 된 겁니다. 현재 160억 유로를 떠안고 있는 IMF가 철수한다면 최대 860억유로의 구제금융도 물 건너 가게 되니까 이건 분명 ‘신뢰할 만한 위협’입니다.

어쨌든 IMF 변수가 어떻게 처리되는가가 남았을 뿐, 현재 그리스의 사태는 독일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메르켈 총리의 완벽한 승리는 앞으로 엄청난 후유증을 낳을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힘을 만끽하고 있는 독일에서도 불안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21일자 슈피겔은 나치의 친위대와 메르켈 총리가 함께 서 있는 합성사진을 표지에 올렸습니다. 블로메, 뵐, 쿤츠 등 8명이 함께 쓴 이 장문의 기사 제목은 “제4제정(The Fourth Reich)”입니다. 메르켈의 독일은 신성로마제국, 비스마르크의 제2제정, 히틀러의 제3제정에 이은 제4제정이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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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과 대포가 아니라 유로를 앞세운 독일은 사실상 유럽의 제국이 되었습니다. 유럽 재정위기 이후 독일은 자신의 규율(긴축)을 다른 나라에 강요하는 “군기반장(discipliner)”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약한 나라의 주권을 여지없이 짓밟는 것이었고 그리스 국민이 겪은 모욕감은 아주 오랫동안 상처로 남을 겁니다. 그리스나 스페인에서 벌어지는 데모에는 ‘히틀러의 콧수염을 단 메르켈’이 꼭 등장합니다. ‘남쪽’의 시민들은 현재 독일의 태도에서 나치를 연상하고 있습니다. 치프라스가 만일 그리스의 빚을 제대로 받으려 한다면 2차대전 때의 배상부터 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죠.

문제는 독일이 경제적으로 유럽을 지배하려 하지만(dominate), 이끌려 하지는(lead)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독일을 “절반 헤게모니(semi-hegemony)”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특히 유로존 위기와 관련해서 이 태도는, 독일 특유의 “질서자유주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의 경험에서 나온 중앙은행의 독립성, 알뜰살뜰 아껴서 위기를 극복한 경험(긴축)이라는 독일의 규범을 다른 나라에 강요하는 동시에, 유로의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된 남쪽의 빚을 나눠서 부담하지는 않으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유럽의 통합을 통해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던 하버마스에게 현재의 위기와 독일의 태도는 정말 실망스러울 겁니다. 그는 메르켈이 그리스에 긴축을 강요해서 경제적 폐해를 끼칠 뿐 아니라(이 노학자는 ‘독극물’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유럽통합의 대의인 연대를 해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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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 관한 첫 편지에서 말씀 드렸듯이(☞바로 가기), 생산성 격차가 나는 나라들이 같은 통화를 사용하면 필연적으로 구조적 불균형이 발생합니다. 이런 불균형을 시정하는 환율메커니즘이 없는 상태에선 적자국의 임금과 물가가 내려가야 합니다. 적자국에게 재정보조금을 주지 않기 위해서 사전에 “안정성장협약(stability-growth pact)”을 맺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유로 출범 후 10년 동안 금융은 이 불균형을 메우고 또 은폐했습니다(골드만삭스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라이시 교수의 글(☞바로 가기)을 참조하십시오.)

케인스가 브레튼우즈 협상에서 제안했던 “청산동맹”(경상적자국 뿐 아니라 흑자국에도 벌금을 물리는 제도)은 유럽의 이런 불균형뿐 아니라 글로벌 불균형에 대응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도 “청산동맹”의 다양한 변형이 해결책으로 각광을 받은 바 있습니다.

이런 최소한의 장치도 없는 상태에서 불균형은 심해질 것이고 아름다운 유럽의 꿈은 신기루로 판명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유럽통합에 회의적인 스트렉(Streeck, Wolfgang)은 하버마스를 ‘경제문맹’이라고 비판했죠. 제도적 장치와 더불어, 진정으로 필요한 건 유럽시민으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연대와 민주주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은 긴축을 통해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관철시켰습니다. 이런 태도를 지닌 리더가 과연 존경을 받을까요? 많은 이들이 우려하듯이, 100년이 넘은 유럽의 꿈(1905년에 레닌도 “유럽합중국에 대하여”라는 칼럼을 썼으니까요)은 백일몽이 되는 중입니다.

▲ 지난 2010년 한국을 방문한 메르켈 독일 총리가 당시 국회의원이던 박근혜 대통령을 만났다. ⓒ연합뉴스

가계부채 종합관리 방안

요즘 글이 너무 길어져서 한 주 동안 일어난 주요 경제 사건의 맥을 짚는다는 ‘주간 프레시안 뷰’의 기획 의도가 깨어지고 있습니다. 금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부가 이번 주에 발표한 “가계부채 종합관리방안”을 자세히 해설할 여력이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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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가계부채는 외부 충격에 취약한 상태, 특히 자산 가격이 하락하는 경우 위험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고소득층의 부채가 많아서 괜찮다고 하지만 금리가 상승하거나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는 경우 이들이 제일 위험해진다는 사실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오직 부동산 경기를 살리는 데 혈안이 된 정부의 정책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죠.

그래서 정부는 현재의 부동산 경기가 지속되면서도 가계부채는 늘어나지 않고, 동시에 부동산 가격이 떨어질 경우에 대비하는 정책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첫째, “처음부터 나누어 갚아나가는 방식”(분할상환)으로 대출구조를 개선함으로써 가계의 대출 증가 속도를 줄이는 겁니다. 당장 다음 달부터 갚아야 할 돈이 꽤 크다면 돈을 능력 이상으로 빌리지는 못할 테니까요. 둘째, “상환능력 심사방식을 선진국형으로 개선”해서 금융기관의 대출을 줄이고 셋째, “제2금융권의 비주택 대출이 과도하게 증가하지 않도록 관리 강화”를 하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넷째로는 “관계기관 합동으로 모니터링을 대폭 강화”하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즉 돈을 빌리는 가계, 빌려주는 금융기관, 그리고 감독기관 3자가 모두 자제하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만시지탄이라고 할까요? 이들 정책의 방향은 옳습니다. 하지만 “빚 내서 집 사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라며 한껏 빚을 늘려 놓고 이제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비난을 피할 길은 없습니다. 정부는 여전히 부동산경기를 살리면서 동시에 가계부채도 관리한다는 모순된 목표를 추구하느라 우왕좌왕하는 중입니다.

물론 무소불위, 박 대통령의 관심은 온통 경제성장입니다. 괜찮다면 빚을 내도록 방치하고, 구조개혁 없이는 성장도 있을 수 없다며 정부와 정치권에 4대 개혁을 촉구하는 모습은 어딘가 콧수염 단 메르켈을 닮지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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