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자본가는 진화한다

일단 자본가라는 말을 ‘큰 규모의 자본을 움직일 재량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하자. 자본가는 자본주의의 긴 역사를 통틀어서 변하지 않는 본성을 가진 존재일까? 아니면 자본주의의 역동적인 변화에 따라서 계속 진화해나가는 존재일까? 19세기 중반의 카를 마르크스와 같은 이는 전자의 입장을 취하였다. <자본론>에서 자본가란 자본주의가 출현한 순간부터 언젠가 사라질 미래에 이르기까지 한 푼이라도 더 벌어 자기 소유 재산을 불린다고 하는 자본의 운동 법칙에 완벽히 지배되는 존재, 즉 “돈가방씨 (Mr. Moneybag)”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를 맞게 된다.

그럴 만도 했다. 20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파급되었던 2차 산업혁명은 산업 패러다임뿐만 아니라 영리 활동의 방식과 스타일도 모두 바꾸어 버렸다. 이러한 변화 물결의 맨 앞에 서서 이를 이끌고 또 그를 통해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규모의 이윤을 거두는 새로운 세대의 자본가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종류의 인간형이었다. 닥터로우의 소설 <랙타임>에 보면 옛날 자본가의 대표라 할 존 P. 모건과 새 시대의 자본가인 헨리 포드가 만나는 가상의 장면이 나온다.

고대 이집트의 신비주의에 몰두해 영생불사의 꿈에 집착하는 모건은 헨리 포드에게 당신은 고대 파라오의 환생이라고 우겨대지만, 과학적 경영과 벨트 컨베이어의 합리성에 길들여진 포드에게는 씨알머리도 먹히지 않는다. 이것이 중화학 공업과 자동차 산업에 근거한 20세기 자본주의의 벽두에 좀바르트가 목도했던 자본가의 진화였을 것이다.

21세기의 자본주의는 드디어 3차 산업혁명의 물결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자본가들도 옛날과 다르다. 저커버그는 99%의 재산을 “기부”했다. 일론 머스크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 에너지 전환과 화성 개척에 온 인생을 쏟아붓고 있다. 빌 게이츠는 인류의 운명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매주 관련된 책 한권씩을 읽고 서평을 게재하며 파워 블로거로 변신하였다.

자본 축적의 논리에 악착같다는 점에서 보자면 분명히 마르크스가 살았던 19세기의 자본가들과 다를 바가 없지만, 그것만으로는 3차 산업혁명 시대를 주도하고 있는 이들 새로운 자본가의 성격을 해명할 수 없다. 작고한 스티브 잡스도 또 방금 언급한 세 사람도 모두 스스로를 ‘모종의 임무를 완수’하려는 존재로 여기고 있으며, 그 ‘임무’가 단순히 떼돈을 긁어모으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이러한 슈퍼스타들뿐만이 아니다. 지금 혁신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기업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마음이) 젊은 사업가들을 보라. 이들은 마르크스에게 익숙했을 디킨스 소설의 스크루지 영감 같은 캐릭터들과는 큰 거리가 있으며, 나름의 ‘임무’를 찾아가려 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다.

한국의 재벌 오너들도 진화하고 있을까? 그들은 무슨 ‘임무’를 추구하는 것일까? 의심스럽다. 강남의 노른자 땅을 차지하기 위해 수조원의 웃돈을 퍼붓고, 기술 투자가 절박한 상황에서 주가를 올리겠다고 수조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을 벌이고, 그야말로 지대 추구의 절정이라고 할 면세점 허가를 얻어내기 위해 각축전을 벌이고, 수천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하여 역술인에게 투자를 맡겼다가 모두 날리고, 빵집 순대 떡볶이집에까지 사업 영역을 넓히겠다고 프랜차이즈 사업을 기획하고, 굴지의 규모를 가진 거대 기업 집단을 무슨 집안 소유물이나 되는 양 아버지와 두 아들이 이전투구를 벌이고, 주주들끼리는 배당 잔치를 벌이면서 갓 뽑은 20대 직원들까지 해고로 내몰고….

이 모든 행태들은 사실 21세기의 3차 산업혁명은커녕, 자기 개인과 집안의 이기적 탐욕으로 사회 전체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공분에 휩싸였던 1920년대 일본 재벌의 모습과 훨씬 닮아 있다.

진화는 필연이 아니다. 변화하지 못하거나 퇴화한 존재들이 도태되어 사라지는 일은 오늘도 생태계 전체에서 무수히 벌어지는 일이다. 안타깝고 걱정이 되는 것은, 이 진화하지 않는 이들에게 산업을 조직할 자원과 권력을 대부분 위임해 놓은 한국 자본주의와 그 안에서 오늘 하루도 피땀 흘려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운명이다.

그렇다고 진화라는 게 옆에서 소리 높여 촉구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니 답답할 뿐이다.

원 글은 경향신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