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경제학] 우리는 왜 절망적일까?

우리는 왜 절망적일까?

정태인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

몇 년 만인가요? 2016년, 다시 <작은책> 독자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혹시 기억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지난번에는 “신뢰와 협동”에 관한 글을 연재했습니다. 덕분에 그 결과를 재정리해서 《협동의 경제학》이라는 책을 낼 수 있었습니다. 재미없는 경제학 얘기를 여러분이 들어 주신 결과입니다.

이번에는 “불평등”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지금 한국은, 아니, 세상 전체가 절망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합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저 같은 50대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절망을 느끼는 모양입니다. “헬조선”이라든가, “금수저, 흙수저” 같은 말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전쟁 후의 참혹함이나 60~70년대의 빈곤을 말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일제 강점기를 실감할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한술 더 떠서 “네 나이 때 나는…” 식으로 얘기를 꺼내고 “노력하면 안 될 일이 없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린다면 ‘꼰대’라고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왜 이렇게 된 걸까요? 이 절망의 원인을 알 수 있다면 이제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지, 나아가서 어떻게 희망의 세상을 만들 건지도 알 수 있겠죠. 해서 일단 시리즈의 제목을 거창하게 “희망의 경제학”으로 잡았습니다.

물론 제가 이 엄청난 사태를 꿰뚫어서 정확한 답을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경제 이론과 통계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는 있을지도 모릅니다. 언제나 그렇듯, 그럴듯한 답을 찾으려면 질문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일단 가장 추상적인 질문에서 시작해 보도록 합시다. 지금 우리나라의 1인당 GDI(국민소득)는 2만 8천 달러 정도 됩니다. 1년에 한 사람 당 약 3천만 원의 소득을 올린다는 얘기죠.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갸우뚱할 겁니다. 가령 식구가 네 명인 집이라면 1년에 평균 1억2천만 원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얘기니까요. 아마 <작은책> 독자 중 이 정도의 소득을 올리는 집은 10퍼센트(1퍼센트?)도 되지 않을 겁니다.

이 수수께끼는 우선 1인당 GDI에는 가계소득뿐 아니라 기업소득도 합쳐서 계산했기 때문에 생긴 겁니다. 기업소득을 떼어 내고 가계소득만 계산하면 얼마나 될까요? 이를 ‘가계총처분가능소득(PGDI)’이라고 부르는데, 2014년의 1인당 PGDI는 1만 5786달러입니다(2015년 통계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충 원화로 환산하면 1800만 원 정도가 되는 거죠. 특히 우리나라는 기업소득의 증가율은 높은데 가계소득은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어서 GDI와 PGDI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습니다. 대기업은 남아도는 현금을 쓸 데가 없고, 일반인들은 쓸 돈이 없는 상황입니다.

두 번째 실마리는 이 수치들이 평균값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우리 국민 모두의 소득이 0이고 한 사람이 모든 소득을 다 차지한다고 해도 평균값은 2만 8천 달러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소득 순으로 죽 세웠을 때, 맨 가운데 있는 사람의 소득은 얼마나 될까요? 한성대의 김상조 교수가 국세청의 통합소득 자료를 이용해서 계산한 값은 약 1660만 원이고, 김낙년 교수가 국세통계연보를 기초로 해서 일시적 취업자까지 포함(3122만 명)해서 계산한 값은 1074만 원(2010년)에 불과합니다(김상조 교수 쪽의 값이 큰 이유는 소득세를 내지 않는 가난한 사람들은 제외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전 국민의 소득이 똑같은 경우(완전 평등)와 1명이 모두 가진 경우(완전 불평등)를 비교해 보면 전자의 경우 중위값은 평균값과 같지만, 후자의 경우엔 0이 됩니다. 즉 평균값과 중위값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불평등이 심한 거지요. 여러분은 이런 소득 분포에서 어디쯤 있을까요?

1994년 우리나라의 1인당 GDI는 1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20년 전, 김영삼 대통령 때의 일입니다. 지금의 4,50대가 청춘이었을 때죠. 그런데 왜 지금 2,30대는 훨씬 더 미래를 절망적으로 바라보는 걸까요? 물질적으로 세 배쯤 더 풍요로워졌는데 왜 그런 걸까요?

우리가 앞으로 함께 풀어야 할 문제가 바로 이겁니다. 제가 잠정적으로 가지고 있는 답은 첫째, 행복은 물질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이른바 “행복경제학”이 다루는 내용입니다), 둘째, 평균으로 세 배지만 불평등이 심해져서 보통 사람은 절대적으로 그리 나아지지 않았고, 상대적으로는 오히려 나빠졌기 때문에(“불평등의 경제학”), 그리고 셋째로 앞으로 나아질 전망이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즉 ‘상향 이동성’이 낮아졌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960년대 초, 우리나라는 대단히 평등한 나라였습니다. 식민지를 겪은 나라 중에 토지가 가장 평등하게 분배되어 있었고, 중위소득이 가장 높은 나라(소득도 평등했다는 얘깁니다)였으니까요. 선진국을 다 포함해도 가장 평등한 나라 중 하나였을 겁니다.

1970년대에 불평등이 심해졌지만 198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는 소득이 오히려 평등해지기도 했습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이 속속 결성되면서 임금이 빨리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당시는 ‘3저 호황’(저유가, 저금리, 낮은 원화 가치) 덕에 수출도 급속하게 늘어났습니다. 수출과 내수가 동시에 증가하던 시기였죠.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옛날 생각을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언제 살림살이가 가장 나아졌고 미리에 대한 전망도 가장 좋았는지…. 이 시기가 아닐까요?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모든 것이 변하고 말았습니다. 앞으로 통계로 확인해 드리겠지만 성장률은 떨어졌고, 불평등은 깊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은 고도성장으로 유명했지만 이젠 가장 급속하게 불평등해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 이동성도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데, 잘사는 아이들은 50미터 앞에서 출발합니다. 더구나 자전거 같은 도구도 사용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대학 입시 성공의 세 가지 조건이라고 말하는 “할아버지의 재산,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은 결코 헛말이 아닙니다.

재산과 소득이 평등한 상태에서 교육은 사회 이동의 통로였습니다. 극히 일부의 부자들이 가정교사를 두긴 했지만 그래도 노력만 하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었죠. 개천에서 용이 나오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재산과 소득이 불평등해졌고, 자신만의 노력으로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 됐습니다. 개천에서 용은커녕 이무기도 나오기 힘듭니다. 더구나 <응답하라 1988>에서 볼 수 있는 마을 공동체는 해체됐고 치열한 개인 간 경쟁만 남았죠. 그 어디에도 위로를 받을 곳은 없습니다.

점잖게 “아프니까 청춘”이고, 먼저 ‘노오력’하라는 얘기는 실은 현재의 불평등을 받아들이고 체념하라는 얘기와 같습니다. 나이 지긋한 분들께 다시 한번 묻습니다. 아이들 나이 때 난 얼마나 공부(노오력)했을까? 제가 강연 때마다 하는 질문입니다만 현재 아이들의 50퍼센트 정도는 공부했다고 손드는 분은 한 명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피케티가 ‘세습자본주의’라고 부른, 바로 그것입니다. 양반, 상놈, 노비로 신분이 나뉘어 있어서 그 벽을 넘을 수 없었던 조선시대와 별로 다를 게 없다는 얘기죠. 아이들 절망의 원인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앞으로 이런 주장들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고 그 답을 같이 찾으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의견이 절실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영 답을 찾지 못할지도 모르니까요. “희망의 경제학”이라고 제목을 붙여 놓고 “절망의 경제학”으로 끝나선 안 되겠죠?^^

위 글은 < 작은책>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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