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보수의 재구성

[세상읽기]보수의 재구성

홍기빈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것이 화두가 되었던 적이 있다. 그 이전의 열린우리당-민주노동당이라는 민주개혁세력의 구성이 시대에 맞지 않게 되어 대규모 정계 개편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상당한 재구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이에 원내·원외의 진보정당들은 복잡한 이합집산을 거쳐나갔으며, 당시의 민주당 또한 어느새인가 ‘진보’라는 이름을 둘러쓰게 되기도 했다.

이번 총선에서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상황은 가히 ‘보수의 재구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이른바 ‘합리적 보수’를 표방하는 여러 흐름들이 분출하여 ‘부패하고 무능한 시대착오적 수구 세력’과 ‘이념과 독선을 버리지 못한 1980년대 운동권의 잔재’ 양자 모두와 선을 긋고 독자적인 정치적 지도 세력이 되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안철수가 이끄는 국민의당, 김종인 대표가 이끄는 더불어민주당, 유승민 등으로 상징되는 새누리당 ‘비박’ 등의 존재이유를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현재는 지난 반세기 동안 작동해 온 한국 자본주의 모델이 그 끝을 보이고 있는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지표로 나타난 경제 실적의 중장기적 경향뿐만 아니라 인구 절벽이나 교육 시스템의 붕괴 및 불평등 심화 등의 각종 사회 지표 또한 이를 명확히 가리키고 있다. 동북아 질서의 변화도 중대한 국면으로 가고 있는 데다 여기에 전 세계를 휘감고 있는 ‘4차 산업혁명’ 충격까지 밀려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정치적 지형과 담론 구조는 해묵은 이념 및 세력 대립 구도 속에 갇혀서 1980년대 아니 심지어 1970년대로 끝없이 퇴행하면서 사회 전체를 물귀신처럼 침몰시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스스로를 ‘합리적 보수’라고 여기는 이들과 세력들이라면 이러한 정치 구도의 현상 타파를 꾀하자라는 흐름을 형성할 만하며, 비록 발원지는 서로 달라도 흘러가는 지향점은 비슷하다는 느낌을 준다.

나는 개인적으로 선거 이후에 더욱 관심이 간다. 당면한 총선에서 이러한 ‘합리적 보수’의 여러 흐름이 대통령에 대한 절대 충성이라는 원칙으로 뭉친 새누리당에 맞서 어느 만큼이나 세를 확장할지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이후에 과연 스스로의 방향을 찾아나갈 수 있을지도 지금으로서는 확신할 수가 없다.

가장 회의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이 ‘보수의 재구성’에 별로 이렇다 할 만한 노선과 방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는, 굳이 별쭝나게 새로운 기획과 노선을 만들기보다 이념과 정파에 휘둘리지 않는 실력있고 경륜있는 전문가들을 제대로 중용하기만 하면 된다는 인식이다. 현재의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나름의 진단과 지금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해법이 무엇인가에 대한 천착이나 설득력있는 설명 등은 찾아보기 힘들고, 그저 각자가 거느리고 있는 전문가 엘리트의 네트워크를 과시하는 것으로 충분히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고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여기에서 예전 진보 진영에서 시도되었던 ‘재구성’이 왜 큰 성과 없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는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당시에도 이렇다 할 내용, 즉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분석과 그에 기반한 노선 및 방향을 내걸고 나온 세력이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러한 내용이 없는 상태이니 ‘재구성’이란 결국 하릴없는 이합집산이 될 뿐이었으며, 여기에서 해묵은 은원관계와 계파 싸움이 다시 살아나 원심력만 커져가는 과정으로 변해갔었다. 보수의 재구성에도 무수한 혁신과 고민을 통한 새로운 내용의 준비가 필요하다.

복지와 증세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대한민국의 과거사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할 것인가? 국가적인 산업 조직의 향도 역할이 사라져가는 재벌 기업들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이런 것들은 새 시대의 ‘합리적 보수’라면 결코 회피해서는 안될 굵직한 질문들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과감한 도전과 내용 및 방향의 제시가 없다면 보수의 재구성도 새로운 정치적 힘의 발흥이 아닌 기존 세력 구도하에서의 이합집산에 불과한 것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개인적인 신념을 떠나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한 시민으로서 보수의 재구성이 적극적인 결실을 맺기를 기대하며 지켜보련다.

원글은 경향신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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