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칼럼] 브렉시트의 정치경제학 – 시각

브렉시트의 정치경제학(1) 

 

정태인(칼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소장)

 

그렉시트와 브렉시트

조합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전 세계가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탈퇴)로 시끄럽습니다. 작년 이맘 때도 유럽이 시끄러웠죠. 딱 1년 전, 2015년 7월 5일 그리스 국민들은 트로이카(유럽집행위원회, 유럽중앙은행, IMF)의 최후통첩안(추가 구제금융에 대한 대가로 강한 긴축정책 요구)에 대한 찬반투표에서 “No”라고 외쳤습니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는 환호했죠.

(그리스사태의 이해를 위해서는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7803

그리스 시민들의 요구는 정당해 보였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나라도 IMF 구제금융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죠. 그때도 196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IMF가 요구한 민영화, 규제완화, 개방, 고금리를 수용했습니다. 이후 우리는 대량해고와 포항제철, 담배인삼전매공사 등의 민영화를 겪어야 했습니다. 파산은 우리의 잘못이니까, 또 IMF라는 국제전문기구가 요구한 것이니까 감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5년 후인 2002년, 우리 GDP가 1997년에 비해 25%가 감소하고, 1인당 GDP는 3분의 1이나 줄어들었다면, 또 공식 실업률이 28%, 특히 청년 실업률은 50%를 넘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그런데 채권단은 약속을 못 지켰다며 지난 5년보다 더 가혹한 요구를 했습니다. 이미 5년 동안 실패로 판명 난 정책기조를 더 강화하라는 거죠. 그리스 시민들은 당연히 들고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치프라스총리는, 그렉시트를 걸고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던 바루파키스 재무장관을 해임하고 최후통첩안보다도 훨씬 굴욕적인 타협안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스가 유로존에 잔류하는 조건으로 상당한 양의 채무탕감을 해줘야 한다고 선언한 세계 유수의 경제학자들(피케티, 삭스, 로드릭 등)로선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었죠. 나라의 운명을 건 치킨게임에서 그리스가 뒤로 물러서서 치킨게임의 합리적 해(치킨게임에서는 (협동,배반)이 균형이다)를 선택한 겁니다.

(자세한 설명은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8356&ref=nav_search

2016년 6월 23일, 이번엔 영국 국민들이 브렉시트(여기서는 EU 탈퇴)를 선언했습니다. 또 한번 저명한 경제학자들은 당황했습니다. 영국 안팎의 경제학자들 중 브렉시트를 옹호한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영국 국민들은 “경제학자들의 말을 믿지 말아라. 세계금융위기도 맞추지 못하지 않았느냐? 당신 스스로를 믿어라”는 마이클 고브 영국 법무장관의 말을 들었습니다. 브렉시트를 둘러싼 치킨게임은 아무도 양보하지 않음으로써 균형이 아닌 파국으로 치달았습니다.

영어 스펠링 하나 차이지만 그렉시트와 브렉시트는 사뭇 다릅니다. 그리스는 유로존 국가지만 영국은 유로를 쓰지 않는 유럽연합(EU) 국가입니다. 그리스의 문제는 유로존 국가들이 재정통합까지 나가든지, 아니면 유로를 포기하고 국민 통화로 복귀해야만 해결됩니다. 진정한 하나의 나라라면 어떤 지역이 위기에 빠졌을 때, 당연히 정부가 재정 지원을 하겠죠. 예를 들어 강원도가 어떤 이유에서든 경제위기에 빠진다면 중앙정부는 당연히 재정 지원을 할 겁니다. 하지만 유로존의 재정은 각국에 맡겨져 있고, 메르켈 독일 총리는 “그건 네 탓이니 허리띠를 졸라매라”며 긴축을 요구했습니다. 유럽시민으로서의 정체성, 또는 유럽 차원의 민주주의는 아직 요원한 일이라는 게 증명된 셈입니다.

유럽통합의 역사는 ‘단일 시장 만들기’와 ‘통일된 규제’라는 두가지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 왔습니다. 전자에는 시장 논리가, 후자에는 사회복지의 논리가 강하겠죠. 영국은 거대한 단일 시장에서 오는 이익은 누리고 싶지만, 인권과 사회, 환경을 위한 규제는 피하고 싶었습니다. 영국이야말로 시장만능을 신봉하는 앵글로색슨 모델의 원조잖아요.

브렉시트에 찬성한 이들은 대체로 중북부의 전통적 제조업 지대, 노인들, 이민 반대자, 빈민들로 사회적 약자에 속합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세계화의 ‘루저’들인 셈이입니다. 브렉시트를 부추긴 정치인들의 감언이설도 난무했습니다. 유럽에 내는 분담금으로 국가의료체제(NHS)를 강화할 수 있다든지, 영국 국민의 복지를 빼앗는 이민자나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든지, 유럽연합의 규제를 없애면 산업이 살아날 거라든지, 모두 확실한 거짓말이거나 근거가 없는 말들이었죠.

그런데 왜 영국 국민의 35% 이상(투표자의 52%)이 브렉시트에 찬성했을까요? 직접적으로는 시티(런던의 금융중심지)가 싫고, 보수당이건 노동당이건 기존 정당을 믿을 수 없고, 경제학자등 잘난 척하는 지식인들도 꼴보기 싫었을 겁니다. 한마디로 양극화의 수혜자인 상층 엘리트들에게 한방 먹이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또 국가주권을 잃고 유럽의 한 주가 된다는 생각도 대영제국의 후예들에겐 황당한 일이었을 겁니다. 더구나 영국은 전통적으로 유럽대륙과 아메리카 대륙 사이에서 오락 가락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죠. 나이 지긋한 분들은 1960년대에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입하려다 프랑스의 드골대통령에게 두 번이나 거부당한 수모를 기억해냈을지도 모릅니다.

영국도 양극화가 심해지는 나라 중 하나입니다. 유럽에서는 가장 심각하죠. 영국 시민들 중 절반 가량은 희망이 없어진 건 유럽연합 때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실험경제학에서 입증하듯이 사람들은 앞날의 희망이 별로 없어 보이면 모험을 택하기 마련입니다(심지어 식물들도 마찬가지랍니다).

반면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경제학자나, 영국정부, 또는 OECD와 같은 국제기구가 내세운 브렉시트의 악영향도 그리 믿을만 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파운드화의 가치가 10% 가량 떨어졌는데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영국 수출이 늘어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한편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했다고 해서 대륙의 국가들이 당장 관세를 올릴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40년간 지속해온 대외관계를 몇 년 만에 바꿔야 합니다. 모든 게 불확실성 속에 빠지죠. 가뜩이나 세계침체가 장기화하는 가운데 불확실성이 늘어나면 기업들이나 소비자들은 활동을 멈추게 되겠죠. 특히 런던에 있는 외국 금융기관들이 대륙으로 거점을 옮기려고 할 겁니다.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유럽연합에서 떨어져 나온 영국의 외교적 위상은,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훨씬 초라해질지도 모릅니다. 미국도 예전처럼 영국을 특별 취급하지 않을 테니까요.

 

폴라니의 대응운동

하지만 속았든 분노했든 브렉시트에 찬성한 영국 시민들 역시 크게 보면 반세계화를 외친 게 아닐까요? 그런데 왜 저명한 경제학자들이 그렉시트 땐 그리스 시민들을 편들고, 브렉시트 땐 유럽연합의 손을 든 걸까요? 특히 스티글리츠나 로드릭과 같이 “또 다른 세계화”를 줄곧 외친 학자들은(3류인 나도 마찬가지) 입을 다물거나 브렉시트를 우려하고 있는 걸까요?

아마도 그 이유는 이들이 유럽형의 지역공동체를 대안적 세계화로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즉 지적재산권 강화나 투자자의 주권 침해를 포함하는 미국식 세계화에 비해 유럽통합이 훨씬 민주적이고 현실적인 세계화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유럽연합은 사회보호라는 면에선 분명 진보적이었지만 단일 시장만들기, 특히 통화통합 과정에서 선출되지 않은 관료(집행위원회)의 비밀주의 행정이 돋보였고, 유럽위기에 대한 대응은 IMF마저 걱정할 정도로 금융자본과 강대국의 이해를 적나라하게 대변했습니다. 현실의 대안이 사라질 위기에 빠진 겁니다.

저는 브렉시트 역시 폴라니의 대응운동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맑스가 자본주의의 원형으로 생각했던 영국, 제1차 세계화의 추동자였던 영국, 여전히 세계 5위, 유럽 2위의 대국인 영국. 즉 말하자면 세계화의 종주국에서 세계화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겁니다. 폴라니는 시장원리로 사회 구석구석을 조직하면 사회는 갈기갈기 찢어지고 결국 사회는 스스로를 보호하는 대응운동을 일으킨다고 설파했습니다. 이 운동은 우루과이라운드에 반대하는 농민운동, 시애틀의 반신자유주의 운동, “점령하라” 운동, 포데모스나 시리자의 집권 뿐 아니라 브렉시트와 같은 국수주의적 움직임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거대한 전환”에는 그런 복고적, 퇴행적 반대운동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곡물법과 같은 보호무역주의나 러다이트운동도 그런 예에 들어갑니다. 시대를 앞서 가든 시대착오적이든,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심지어 인종차별적이든 시장만능의 세계화에 대한 대중들의 저항임엔 틀림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폴라니의 해법을 따르자면 전 세계차원에서 시장을 다시 사회에 묻어버리는 “또 하나의 세계화”가 필요한 거죠. 많은 아이디어가 나왔지만 그 어느 것도 세상의 장삼이사들, 특히 젊은이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는 그런 설득을 해 낼만한 정당이나 정치가도 없습니다. 기성 대형정당과 정치인들의 실패라고도 말할 수 있고 민주주의의 한계라고도 말할 수 있겠죠. 양극화로 인한 불만과 절망은 좌우 포퓰리즘, 나아가서 영국의 독립당이나 미국의 트럼프와 같은 극우 정치세력의 훌륭한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세계는 전후 30년과 같은 안정된 국제질서를 다시 찾아낼 수 있을까요? 이것이 브렉시트가 우리에게 던진 진정한 질문일 겁니다.

 

로드릭의 트릴레마

그 답의 실마리를 로드릭의 “글로벌 경제의 트릴레마”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경제학교과서에 나오는 국제경제의 트릴레마는 다음과 같습니다.

noname01

<그림1> 국제경제의 트릴레마

<출처> 한국은행

 

즉 어떤 나라의 대외경제체제도 고정환율제도와 자본자유화, 독자적 통화정책 셋 중 둘 이상을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는 얘깁니다. 고정환율제와 자본자유화를 택한 것이 전전의 금본위제도입니다. 자본은 자유로이 이동하되 금본위제이기 때문에 국내 물가의 조정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독자적 통화정책은 포기해야 합니다. 독자적 통화정책과 고정환율제도를 선택하면 전후 70년대초까지 유지된 브레튼우즈체제입니다. 바로 케인즈가 구상한 체제죠. 1933년 케인즈는 “국민경제의 자립”이라는 유명한 글을 발표합니다. 케인즈는 이 논문에서 그 때나 지금이나 경제학에서 당연히 받아들이는 개방경제를 비판했습니다. 자본이동을 제한하고 상대적으로 독립된 국민경제들이 무역을 통해서 교류하되 지나친 불균형이나 금융위기를 브레튼우즈체제(당시의 IMF-GATT 체제)가 조정한다는 발상이죠. 이 체제 하에서 전후 30년동안 세계는 안정인 고도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자본자유화와 독자적 통화정책을 조합한 것이 현재의 변동환율제도입니다. 환율이 각종 불균형을 조정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론 국내에서는 정책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그림은 말 그대로 이론일 뿐입니다. 각 체제는 고유의 모순을 안고 있어서 심각한 위기를 맞기 십상입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듯이 변동환율제를 택한다고 해서 정책의 자율성이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급격한 자본이동이 금융위기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죠. 금본위제로 인해 위기가 심화되고 결국 전쟁이 일어난 것도 잘 아실 겁니다.

이 그림을 현실의 글로벌 정치경제체제로 확대해석한 것이 로드릭의 트릴레마입니다.

 

noname02

<그림2> 글로벌 경제의 트릴레마

<출처> Rodrik, 2016, BREXIT and the globalization trilemma, Rogdik blog, 13th, June.

눈치 빠른 독자들은 <그림1>의 자본이동이 <그림2>의 하이퍼 글로벌라이제이션(“초세계화”로 번역하겠습니다)에, 그리고 독자적 통화정책이 국가주권에 대응하고, 약간 이상하지만 고정환율제가 민주적 정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셋 중 둘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초세계화와 국가주권을 결합한 것이 금본위제 하의 세계체제입니다. 금본위제는 강한 대외 제약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대외 균형을 맞추기 위해선 국내의 민주주의, 또는 복지는 무시되기 마련입니다. 바로 금본위제라는 “황금구속복” 속에서 각국은 보호주의로 치닫다가 1930년대에 영국을 필두로 모두 금본위제를 포기하게 됩니다.

국가주권과 민주적 정치를 택한 것이 브레튼우즈 체제입니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국제 관계 속에서 유럽의 일부 국가는 상당히 이상적인 사회복지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었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케인즈의 구상이 실현된 체제입니다.

초세계화와 민주주의 정치를 결합하려면 세계정부, 즉 전 세계나 특정지역이 미국과 같은 연방제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유럽연합이 꿈꾸고 있던 이상이고 지금도 독일과 프랑스는 “더 긴밀한 유럽”을 외치고 있죠.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현실은 민주주의 없는 초세계화에 머물고 있습니다. 브렉시트의 원인 중 하나에 틀림없습니다.

유럽연합을 구성하고 있는 조직중 EU의회는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있습니다만 행정부 역할을 하는 집행위원회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입니다. 더구나 강대국 몇몇이 비밀리에 아주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기 때문에 비민주적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습니다. 이와 함께 사법부에 해당하는 사법재판소(European Court)의 결정도, 인권과 사회권을 옹호한다 하더라도 개별 국가나 일반 시민들 입장에서는 주권 침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아직 유럽은 “내 나라”라는 정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상태라는 얘깁니다.

그렉시트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통화통합을 하려면 재정통합부터 하고 최소한의 민주적 절차를 거쳐 재정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같은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이 없는 가운데(일부 학자들은 그래서 “재정적자(budge deficit)”가 아니라 “민주주의 적자(democratic deficit”가 문제라고 얘기하죠) 이런 정책은 불가능합니다.

만일 이런 “초세계화”가 불가능하다면 세계화의 깊이와 속도를 조절할 수 밖에 없겠죠. 즉 각 지역이 유럽연합과 같은 공동체를 꿈꾸더라도 지역의 정체성이나 경제적 격차를 고려해서 그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기본적으로 세계화는 자본이동의 자유를 말합니다. 금융자본은 하루에도 지구를 몇 바퀴라도 돌 수 있습니다. 사람이 그 속도를 따라갈 수는 없겠죠. 그렇다면 자본의 속도를 늦추는 게 정답입니다. 브레튼우즈 때처럼 자본이동을 거의 완전히 막을 수야 없겠지만 토빈세 같은 정책으로 속도를 둔화킬 수는 있을 겁니다. 그래서 각국의 정책 공간과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열어 놓아야겠죠. 로드릭이 말하는 “얕은 세계화”, 스티글리츠가 “세계화의 민주화”가 바로 그런 거겠죠.

우리가 “동아시아공동체”를 꿈꾼다면 항상 의식해야 할 문제입니다. 다음 부터는 조금 더 자세히 브렉시트를 들여다 보기로 하겠습니다.

 

* 이 글의 일부는 요약되어 시사인에 실릴 예정입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