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삶의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을의 인생’

김찬호, 김동춘, 손아람, 조국, 정태인 지음/북콤마/1만5000원

입에 풀칠도 못하게 하는 이들에게 고함-가짜 민생 vs 진짜 민생/김찬호, 김동춘, 손아람, 조국, 정태인 지음/북콤마/1만5000원

‘소득 하위 10%의 땅 22만평이 줄어드는 동안, 소득 상위 1%가 서울시만 한 땅의 5배를 불렸다.’ 이 책에 소개된 현실의 한 대목이다. 지난 10여년간 알게 모르게 부의 편중과 불평등 사회로 진입한 한국의 실정을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가 올 1월부터 8월까지 유력 활동가 5인을 인터뷰해 책으로 꾸며냈다. ‘입에 풀칠도 못하게 하는 이들에게 고함’이란 다소 과격한 제목이지만 우리의 문제점을 있는 그대로 들춰내고 있다는 평이다.

올 연말이면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 지하철 구의역에 스크린도어 사고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사진은 사고로 숨진 김모(19)군을 추모하는 승강장 스크린도어에 설치된 위령표와 생전 김군의 가방에 들어 있던 컵라면과 나무젓가락.
세계일보 자료사진

정치인들은 언필칭 민생이라는 말을 쓴다. 원내대표나 최고위원들은 민생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자신들이 앞장서 민생을 더 챙기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래서 개혁을 바라는 저자들은 민생이라는 말이 오염됐다고 질타한다. 민생이라는 말을 전혀 다르게 이해하는 양쪽이 있다. 한쪽에서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고, ‘을’이 겪는 고통을 해결하고, 임차인들이 부당한 계약에 내쫓기지 않도록 주거 문제를 해결하며, 대기업의 ‘갑질’과 불공정 거래를 해소하는, 즉 경제적 약자들을 지원하는 일들을 떠올린다. 반면 다른 쪽에서는 재벌에 물려진 재갈을 풀어주고, 노동개혁이란 이름 아래 쉬운 해고가 가능하도록 하며, 비정규직 규제를 풀어 단기 계약직을 늘리는 것 등을 민생 살리기라고 한다. 극단으로 달리는 실상의 단면이다.

저자들은 비정규직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일깨운다. 비정규직은 일시적이고 정규직은 일반적이란 통념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는 것. 산업 전반에 일시적으로 저임금의 인력을 잠깐 쓴다는 생각이 퍼지고 있다. 한번 비정규직 늪에 빠지면 계속 비정규직으로 살아야 하고, 한번 낮은 지위에서 시작하면 그 자리에 계속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때 가장 큰 희생을 치르는 계층이 청년층이다. 청년들은 빈곤층이나 저소득층으로 분류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정부의 주거 지원 대상도 되지 못한다.

책에서 정태인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장은 “경제학에서 도덕을 빼버린 것이 가장 치명적인 한계”라면서 “경제학은 윤리학과 결합되었어야 한다. 윤리학을 빼버린 순간 경제학은 망가졌다. 그다음에는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일을 당연한 것처럼, 오히려 그게 합리적인 행위인 것처럼 하게 되었다”고 꼬집는다. 작가 손아람은 “정책 입안자들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고 하는데 대체 그 ‘대’는 누구인가요?”라고 묻는다. 대기업의 하청 단가 후려치기가 계속되고 있고, 중소기업 정부보조금의 3분의 2는 대기업으로 넘어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문화산업 또한 하청 산업화되고 있다. 작품을 만드는 창작자의 권리를 제작·유통쪽 업체가 과도하게 차지하는 현실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돌그룹 멤버들인 이른바 ‘스타급’들의 수입은 고작 전체 수입의 10% 미만이라는 불공정계약은 이미 구문이다. 이 책에서 손아람 작가는 스스로 힙합그룹의 멤버로 활동하면서 겪은 음반회사와의 소송 경험을 소개한다. 손 작가는 “지금 성공한 예술가 중 순수하게 자신의 재능만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자신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요”라면서 “지금 활동하는 멤버들은 그나마 입에 풀칠은 할 수 있다. 은수저 출신이다. 이들을 도와주는 부모들이 여유 있는 계층이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두 차례 금융위기 이후 무너진 사회를 어떻게 다시 만들어야 하는가.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는 사회 복원의 수준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성당이나 고찰 같은 유서 깊은 건축물을 찾아갔을 때 그곳에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받는 경험이 그렇다. 좋은 사회는 소속감만으로 구성원들에게 품격을 누리게 하는 곳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사회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는지 직감적으로 판단한다. 사람을 존중하는 사회라는 느낌, 그런 자존감을 회복하는 수준을 말한다.”

저자들은 “청년층을 포함해 중산층 이하 사람들은 점점 삶의 기회가 줄어들고 있음을 직감한다”면서 “힘들어도 아직 기회가 남아 있다고 느껴지면 견딜 만하지만 더 이상 기회가 없음을 확인하는 순간 주체하기 어려운 절망과 분노가 자라난다”고 지적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저 진보적 활동가들의 ‘주장’ 정도로만 치부했던 것들이 이젠 피부에 와 닿는, 심각한 시점에 도달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원글은 세계일보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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