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민주화는 실패했다

현재의 박근혜 정권을 둘러싼 각종 추문과 의혹, 그리고 국가 권력이 백남기 농민의 사인을 둘러싸고 또 송민순 전 장관의 회고록을 둘러싸고 보여주고 있는 행태는 실로 많은 이들을 경악으로 몰고 가고 있다.

이를 두고 박근혜 정권 몰락의 시작으로 보아 이를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 교체의 결정적 시발점으로 활용하려는 생각을 가진 이들도 많다고 본다. 이러한 무지한 관성에 대해 근본적인 반성을 하는 일은 현재 제기되고 있는 각종 의혹을 제대로 규명해 내고 또 폭력적인 권력 행태를 막아내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번 사태에서 정말 우리가 충격을 받아야 할 지점이 있다. 이른바 민주화가 시작된 지 30년이 지났건만 한국 사회의 속살은 전혀 민주화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놓고 의료계 일각이 보여준 행태를 보라. 국정감사장에서 부하 직원에게 답변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던 공공기관장을 보라. 권력층 자녀 한 사람을 놓고 최고의 고등교육 기관이라고 자부하는 곳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보라. 목적도 절차도 석연치 않은 재단들을 놓고 순식간에 몇백억원을 갹출해 낸 기업들을 보라. 사회의 여러 부문에서 최소한으로 지켜져야 할 자율성도, 원칙도, 모조리 내팽개쳐진 채 오로지 권력에 굴종하여 최대한의 이득과 지대를 뽑아낸다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행태가 변함없이 지배층과 엘리트들의 행동을 지배하는 규범이다.

자유·평등 연대라는 고결한 이념은 물론이고 ‘최소한의 양심과 이성에 따라 행동한다’는 자율적 시민 정신은 여기에 한 방울도 스며든 흔적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화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 실패의 원인은 지난 30년간 한국 사회가 품어온 민주주의 이념의 천박성에 있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민주화란 “5년에 한 번씩 선거로 왕을 뽑는 것”이라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물론 1987년 민주항쟁은 부패하고 불의한 독재 권력을 몰아내고 정권 교체를 이루는 것을 민주화의 첫 단추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일정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우리의 민주화는 자유·평등 연대의 가치에 따라 일상적 삶을 계속해서 바꾸어 나가고 이를 통해 정치권력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을 바꾸어 나가는 작업을 하는 데에는 크게 미흡하였다. 그 결과 민주화란 자칭 민주화 세력이 정권을 잡는 ‘정권 교체’와 동의어가 되고 말았다. 그때부터 민주화는 대선, 총선 등 각종 선거가 있을 때마다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는 정치적 수단으로 희화화되어 왔으며, 이러한 경향은 보수 정권이 들어선 이래 더욱더 강화되어 왔다.

민주화는 사회 전체에 지하수처럼 스며들어 꾸준히 대지를 적시면서 새로운 풀과 나무가 자라나도록 만드는 뿌리의 자양분과 원동력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한 결과가 오늘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처참한 ‘시민 사회’의 현실이다.

현재의 상황을 보면서 우리가 다짐해야 할 일은 정권 교체가 아니다.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사회 곳곳을 재구성할 구체적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예전 군사 독재 시절 국가 권력이 노골적인 폭력에 의존했다면, 신자유주의를 거친 오늘날의 국가 권력은 그 막대한 자원 배분의 권력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줄 세우고 무릎 꿇리고 있다.

이러한 변화된 상황에서 공영방송, 고등교육 기관, 체육계, 기업계 등등의 부문을 어떻게 제도화해야 그러한 권력의 전횡에서 지켜낼 수 있을까. 그를 통해 빠르게 변모해가는 산업 사회의 현실에 맞는 효율성을 발휘하면서도 만인의 자유·평등 연대라는 민주주의의 가치에도 최대한 접근하게 만들 수 있을까.

다시 말하지만, 국가 권력을 쥐고서 이를 남용하고자 하는 개인과 세력은 항상 있게 마련이며, 진정한 민주화란 단순한 정권 교체에 있지 않다. 그러한 개인과 세력이 권력을 쥘 수도, 남용할 수도 없는 튼튼한 사회 질서를 만들어 낼 때 비로소 민주화가 진전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번 말하지만, 민주화는 정권 교체가 아니다. 지난 30년간 몇 번의 정권 교체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현 상황에서 ‘반사이익’을 얻어 정권 교체의 거름으로 삼는 데에만 관심을 두면서 이를 민주화라고 정당화하는 이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한 민주화는 실패하였다.

우리는 새로운 민주화의 방법과 길을 제시하는 세력을 기다린다.

원글은 경향신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원글 보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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