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특집-내우외환 한국경제 ‘10년 주기설’ 현실로?

ㆍ최순실 게이트에 트럼프 불확실성까지… 한·미 FTA 재협상 가능성 배제 못해

한국 경제가 안팎으로 우환에 시달리고 있다. 장기 부진에 빠진 경제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는커녕 초대형 정치 리스크에 휘말려 표류 중이다.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태로 구심점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태평양 건너에서 날아온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미국 대통령 당선 소식은 날벼락 같은 일이다. 자국 우선주의와 고립주의, 보호무역주의로 무장한 트럼프 당선인이 취임 후 무역제한 조치나 원화절상 압력 등을 가할 경우 국내 수출은 적잖은 치명상을 입는 게 불가피하다. 하지만 책임지고 위기를 돌파할 조타수도, 길을 밝혀줄 등대도 없다. 박근혜 정부는 이미 ‘식물 정부’로 전락해 국정 수행이 거의 불능 상태다. 1997년 외환위기에 버금가는 위기라는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경제지표는 이미 외환위기 수준

1997년 11월 21일 밤 10시20분. 임창렬 경제부총리가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기로 공식 결정했다”고 밝혔다. 선진국 클럽이라 불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1년 만에 생긴 일이다. 직접적인 원인은 차입에 의존한 대기업들의 방만경영, 대외신인도 하락, 단기외채 급증 등이었다. 그러나 근저에는 30여년간 양적 팽창에 몰두하다 간과해온 기업 경쟁력 상실, 위기관리 능력 부재 등의 누적된 문제들이 정부의 무능과 맞물리면서 곪아터진 결과였다.

그로부터 19년. 시장에서는 ‘10년 주기설’이 거론된다.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에 이어 내년이나 후년쯤 또다시 경제위기가 올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근거는 있다. 그간 경기 부양을 위해 대대적인 ‘돈 풀기’에 나섰던 미국이 돈줄을 조일 채비를 하고 있다. 정부가 각종 규제를 풀어 거품을 키워 놓았던 부동산시장에서는 공급과잉 우려가 커진다. 한국 경제를 견인했던 수출 대기업 주도 성장은 세계 교역량이 감소하면서 도리어 짐이 되고 있다. 정태인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은 “허리를 졸라매서 수출을 증가시키고 재벌들이 대규모 설비투자를 해서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전략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며 “삼성의 갤럭시 노트7이 폭발하고 현대자동차가 100만대 이상 재고로 쌓여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라고 짚었다.

지난 7일 서울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합동 금융시장상황 점검회의에서 임종룡 금융위원장(사진 가운데)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금융위원회 제공

지난 7일 서울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합동 금융시장상황 점검회의에서
임종룡 금융위원장(사진 가운데)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금융위원회 제공

실제로 경제지표들 중 긍정적인 숫자를 찾기가 어렵다. 수출은 올 8월을 빼고 21개월간 줄었다.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올 3분기까지 4분기 연속 0%대에 머물고 있다. 9월 산업활동 동향에 따르면 생산(-0.8%), 소비(-4.5%), 투자(-2.1%) 모두 마이너스다. 제조업 가동률(71.4%)은 9월 기준으로 외환위기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청년 실업률(9.3%)도 외환위기 당시 수준에 근접했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한국 경제는 2011년 8월 경기순환에서 정점을 찍은 뒤 5년 넘게 경기수축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외환위기 당시 29개월간 경기수축이 이어진 것보다 훨씬 길다.

트럼프의 당선은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 경제에 매우 치명적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선거운동 기간 반세계화를 천명하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비롯해 미국이 체결한 FTA에 대한 전면 재검토와 재협상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특히 한국은 대미 무역흑자 규모가 200억 달러가 넘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 비율이 3%가 넘어 미국의 환율 관련 관찰대상국 리스트에 올라 있다. 최악의 경우 트럼프 정부가 한·미 FTA 재협상 카드를 시범 케이스로 꺼내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트럼프 당선자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대해서도 “중국에만 도움이 될 최악의 협정” “끔찍한 협상”이라고 비난하며 탈퇴하겠다고 주장해 왔다. 무역협회는 “트럼프 당선과 함께 미국의 통상정책은 보호무역주의 성향이 짙어짐과 동시에 불확실성이 크게 고조될 것”이라며 “선거기간의 공약을 실현한다면 무역전쟁과 같은 혼란이 초래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내다봤다. 당장 주식시장에서는 피해가 예상되는 자동차 관련주들이 약세를 보이고 있다. 최석영 전 주제네바 대사는 지난 10일 한국경제연구원 정책좌담회에서 “트럼프 행정부에서 TPP 탈퇴 같은 극단적 조치는 어려울 것”이라면서도 “한·미 FTA,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 이미 발효 중인 FTA에 대해 트럼프 행정부가 재검토할 경우 재협상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 불안이 심하다는 점도 외환위기 직전과 유사하다. 김영삼 정부 때에도 집권 초반기에는 첫 문민정부에 대한 기대, 금융실명제 도입 등으로 국정 지지도가 높았지만 집권 4년차인 1996년부터 시작된 기업 줄도산 등 이상조짐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결국 1997년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달 국회 국정감사에서 유일호 경제부총리를 상대로 “우리 경제가 20년 전 IMF 사태 때와 비슷한 상황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며 “정부 임기 말이나 그 언저리에 미국이 금리인상을 하고, 우리나라는 조선·해운에 이어 기업 부실이 터질 수 있고, 가계부채는 늘 시한폭탄”이라고 지적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도 “외환시장 관련 지표는 양호해 보이지만 실물경기는 외환위기 직후와 거의 유사한 정도로 가라앉았다”며 “실물부문 부진이 금융부문으로 전이되는 경제위기가 올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우려했다.

시장 위기감 비해 정부 인식은 안일

시장의 위기감과 달리 정부의 인식은 낙관적인 편이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지난 7일 열린 금융시장상황 점검회의에서 한국 경제상황을 “여리박빙(엷은 얼음 위를 걷는 것과 같이 위태한 상황)”이라고 표현하면서도 “2016년의 한국 경제는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체력) 자체가 붕괴됐던 1997년의 위기나, 외환부문의 취약성이 두드러졌던 2008년 위기상황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정부가 낙관하는 근거는 이렇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부채 비중이 35.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1개국 중 네 번째로 재정건전성이 좋고, 세계 7위 수준의 외환보유액과 낮은 단기외채 비중으로 외환건전성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지표만으로 안심하기는 어렵다. 저출산·고령화로 복지비용이 매년 급증하는 데다 남북관계 변화 등 돌발변수가 생기면 재정수요가 갑자기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또 자본시장의 대외 개방도가 높아 해외 변수에 따라 외국인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위험도 언제든 내재돼 있다. 당장 경제부처에는 트럼프 당선인 측과의 접선라인도 딱히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재계에서는 한·미 FTA 재협상에 대한 우려가 크지만 정부는 “한·미 FTA 재협상 등 정책은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달라지지 않느냐”는 막연한 낙관론을 펴고 있다. 경제가 심리적 요인의 영향을 받는 만큼 정부 입장에서는 가급적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려 하겠지만, 그럼에도 현실 인식이 너무 안이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가운데 경제사령탑의 공백상태가 언제 끝날지도 막연한 상황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태의 돌파구로 지명한 후임 총리와 경제부총리 인선이 어그러지면서 경제부처들은 사실상 일손을 놓은 채 후임 인선에만 촉각을 세우고 있다. 경제상황은 엄중한데도 책임지고 위기를 돌파해 나가야 할 경제팀은 임시체제로 굴러가고 있다.

<이주영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young78@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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