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대통령 투표 전에, 이 사람을 보라!

 

    [대통령 선거 때 읽을 만한 정치고전3]  

G.D.H. 콜 <로버트 오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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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오언 | G.D.H. 콜 (지은이) | 홍기빈 (옮긴이) |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협동조합(KPIA) | 2017-02-10 | 원제 Robert Owen

ⓒ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협동조합(KPIA)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5월 4일부터 양일간 진행된 2017년 대선 사전투표에서 1107만2110명이 투표에 참여해 26.06%의 투표율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번 대통령선거는 전 대통령 탄핵에서부터 새로운 대통령 선출까지 전 국민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열기에는 그을음도 있는 법이죠. 페이스북 등 SNS에서는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을 비난하고 공격하거나 친구 관계를 끊는 일도 잦습니다. 동서양이 일치하는 견해는 중용(中庸)이지만, 여기서 벗어나는 모습들이 가슴 아픕니다.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과잉 몰입하며 주변을 싸늘하고 난감하게 만드는 사람들은 ‘나’보다는 내가 충성하는 분신이 더 중요합니다.

<논어>에 나오는 ‘삼십이립(三十而立)’이라는 말이 무색합니다. 나이 서른이 되면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자립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른들은 대개 물질적으로는 자립했죠. 하지만 정신적으로도 그런가요? 제 스스로도 살짝 말문이 막힙니다. 사실 이 부분이 무척 중요합니다. 유권자가 정신적으로 자립했다면 후보자를 자기 삶의 좋은 수단으로 삼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대통령 될 사람의 거수기 신세를 면치 못하니까요.

세월호 사건, 대통령 탄핵, 대통령 선거로 이어지며 정치가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배웠다면, 그 다음은 어떤 생각으로 대통령 투표에 임하고 뽑은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겠지요.

좀 막연한 고민을 하는 와중에 단비처럼 제 마음에 찾아 온 인물이 있습니다. 로버트 오언(Robert Owen, 1771~1858). 이 사람은 요새 화두가 되는 4차 산업혁명과 연관이 깊습니다. (1차) 산업혁명에 인간이 빨려 들어가지 않고 슬기롭게 대응하는 방법에 대해 평생 고민하고 실천했던 선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현재 기계제 공장이 도입되기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비참 상태에서 저질 인간이 되어 살고 있지만, 한편으로 그들이 연명할 수 있는 생계는 또 기계제 공장의 성공에 달려 있다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 로버트 오언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에서 재인용)

저는 길을 걸어가면서 사람들의 표정을 봅니다. 대개는 표정을 감추고 있지만 친구와 대화를 할 때는 평화롭고 천진난만하고 해맑아집니다. 식당이나 패스트푸드점, 편의점 같은 가게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표정은 유난히 무미건조합니다.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표정이라고 쓰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 그것들이 ‘잠자는 표정’이라고 표현합니다.

10여 년 동안 서울, 인천, 경기도에 살면서도 ‘표정 훔쳐보기’를 했죠. 수도권의 얼굴들은 그래도 ‘활기’라는 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사는 제주의 얼굴들은 조금 더 어두워서 제가 어두워질까 두려워 눈을 감기도 합니다.

마치 섬 전체의 사람들이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에 빠진 듯한 기분입니다. 산업혁명 당시 빈민으로 전락한 사람들도 바로 이런 모습이었겠죠. 이 상황에서 4차 산업혁명 이야기가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을 수 있을까요?

다양성, 융·복합, 혁신을 핵심 화두로 하는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기대되는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 로봇, 자율주행차 등 실생활을 크게 바꿀 주제들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피상적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실생활에 적용된 사례도 많지 않습니다. 특히 해외에서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으니 설익은 용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국가비전이 가지고 있는 위험은 장밋빛 희망으로 그칠 수 있다는 점입니다. 4차 산업을 포함해서 뭔가 근사하고 새로운 개념을 끌고 온 후보는 제 투표 대상에서 제외합니다. 그보다는 변화의 물결에서 채이고 뜯기고 상처 받은 사람의 처지를 챙기는 후보에게는 눈길을 보냅니다.

 

바보야, 문제는 ‘인격’이야!

<로버트 오언>(KPIA,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은 영국 사회주의 사상사 및 운동사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G. D. H. 콜이 쓴 책입니다.

노동조합 운동, 산업 합리화 운동, 아동 교육 운동, 공동체 운동, 협동조합 운동, 세속적 합리주의 운동, 사회주의 운동 등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로버트 오언의 일대기를 당시의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게 썼습니다.

제 지인들에게 ‘로버트 오언’이라는 사람을 아는지 물었더니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로봇 이름 아니냐고 되묻더군요. 저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공상적 사회주의자’ 정도로 알고 있었으니 더 물을 나위도 없겠죠.

일단 책을 다 읽은 후 강렬하게 남은 낱말은 ‘인격’입니다. 로버트 오언 사상의 핵심은 ‘인격’이며, 그는 ‘인간성의 저수지’라고 불러도 될 만한 사람입니다. 저자가 결론에서 보탠 말에서도 이미 오언이 저자의 마음을 빼앗았다는 걸 알 수 있죠.

‘대부분의 경우 전기란 그저 인물의 생애를 적어놓고서 독자가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전기 작가는 자신의 관점과 해석을 그저 배경에만 숨겨두거나 아니면 사실의 선별과 책의 구성 및 안배 등을 통해서만 표출되도록 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나는 오언의 인생을 그런 방식으로 알아서들 이해하시라고 두지를 못하겠다. 왜냐면 오언에 대해서 내가 볼 때에 그릇된 관점 혹은 전혀 잘못된 각도에서 취한 관점이 너무나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 G. D. H. 콜, <로버트 오언>

오언은 적이 많았지만 그들마저도 오언을 사랑했습니다. 그가 하려는 일의 의도와 열망, 그리고 그 안에 풍기는 따뜻한 인간성에는 표정이 절로 환해지죠. 하지만 열망을 이루는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외면 받았습니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저도 책을 읽으면서 오언이 영광의 시절에 세상을 떴거나, 최소한 말년에 심령술 같은 데에 빠져 있지만 않았다면 이 정도로 왜곡되지는 않았을 텐데 하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역시 사람은 마무리가 중요합니다.

오언의 사상을 다루기 전에 한자 공부를 한 번 해봅시다. ‘사람 인(人)’이라는 한자의 기원을 아시나요? 한자의 오래된 기원을 보여주는 갑골문(甲骨文)을 보면 사람의 옆모습을 본뜬 글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 옆에서 바라본 것이죠. 이것은 사람 옆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며, 그 관계가 수직적이지 않고 수평적이었다는 걸 뜻합니다. 오언이 지키려고 했던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언의 시대를 살았던 입법가들과 공장주들은 사람들을 옆에서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봤으며 물건 보듯 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입법가들은 공장들을 오로지 국부(國富)의 원천이라는 단 하나의 관점으로만 다루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 공장들이 한 나라 전체에 전반적으로 확산되면 그 주민들은 새로운 성격을 얻게 된다. 그런데 이 성격이란 개인적 행복에도 또 집단적 행복에도 대단히 해로운 원리에 바탕을 두어 형성된 것이기에 가장 개탄스러우면서도 가장 영구적인 사회악들을 낳게 되어 있다.’  – 로버트 오언이 쓴 글, ‘공장시스템에 미치는 결과에 대한 관찰 소견’

오언이 기독교를 거부한 것도 인간 성격 형성의 책임을 오로지 그 개인 자신에게만 뒤집어씌우는 ‘개인화’를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교육이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어느 날 “교육은 인격이야”라는 생각이 떠올랐을 때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여러 분야에 적용해 보았습니다.

정치도 인격이고, 비즈니스도 인격이고, 사회도 인격입니다. 우리는 이미 대통령의 인격이 나라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배웠습니다. 오언도 이와 똑같이 얘기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전 대통령이 탄핵되던 날에 맛봤던 승리감을 대통령선거 투표가 끝난 날에 다시 볼 수 있겠죠. 그때는 오언의 이 말을 반드시 기억하시면 좋겠네요.

‘여러분은 힘든 싸움 끝에 정치적 자유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정신적 자유는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이것을 갖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정치적 자유도 깨지기 쉬워질 것이며 또 그 가치가 훨씬 떨어질 것입니다.’  – 로버트 오언의 연설 

 

오언이 “정치하지 마라”고 한 까닭

오언은 영국 전체 공장을 방문한 결과를 의회에 보고하며 ‘공장법’ 입법 과정에 열정을 쏟습니다. 열 살짜리 아이가 매일 14시간씩 일하며 점심밥을 단 30분 안에 해치워야 하는 이야기, 하루에 15~16시간씩 교대도 없이 일하는 공장의 현실, 큰 공장의 아이들 1/4~1/5이 불구가 되는 증거들을 제시합니다.

법안이 통과되면 영국은 무슨 이익을 얻게 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그는 “노소를 막론하고 공장 직원들의 건강이 아주 크게 개선되는 것, 자라나는 세대의 교육이 아주 크게 개선되는 것, 농촌에서의 비민 구호 지방세가 아주 크게 줄어드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공장주와 지배계급의 집요한 방해 공작에 법안은 누더기가 됩니다. 공장에서 고용할 수 있는 최소 연령은 10세가 아니라 9세로 낮아졌고, 노동 제한 시간은 12시간(식사시간 미포함하며 포함할 경우는 13시간 반), 그리고 16세 이상의 노동 시간에 대해서는 아무 규제가 없었습니다.

벌금은 두 배로 늘었지만 법령을 집행할 주체는 전혀 없었습니다. 통과된 법안을 본 오언은 자기와는 전혀 무관한 법이라고 천명했습니다. 그러나 1802년에 통과된 이 법안은 보통의 시장에서 채용한 노동의 조건에 대해서 국가가 규제를 가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처음으로 확립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죠.

오언은 노동자들의 일터 환경을 합리적으로 제공하고, 그 가족들의 행복을 증진시킴으로써 작업 능률을 높이고 수익률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일을 논의했던 파트너는 대개 사회 지도층 인사였지만 좌절감을 맛볼 만큼 단호한 거절을 당했죠. 지배계급 사회에서 오언은 영향력을 상실했지만 노동계급과 일반 대중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었습니다. 오언은 위로부터의 개혁을 꿈꿨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라는 명령을 내린 셈이죠.

오언은 노동자들이 정치적 수단을 통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대해서 회의적이었습니다. 민중들은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기에는 교육과 지식이 결여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민중들은 기계가 초래한 산업혁명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채로 막연히 불가해하고 적대적인 힘 정도로만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오언은 기계를 깊이 이해하였고 궁핍의 원인이 기계라는 점도 이해했으며, 그 치료법 또한 기계를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832~1834년 대규모 노동계급 반란을 지도할 때에도 노동자와 민중에 대해서 자애로운 고용주(또는 독재자)의 태도를 유지했기 때문에 오언은 노동계급과 끝까지 함께 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언의 우려대로 노동계급의 정치 운동은 처참한 패배를 맛봅니다. 반항하는 사람보다 진압하는 사람이 훨씬 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책을 덮고 나서도 저는 ‘정치’를 바라보는 오언의 시선이 인상에 남습니다. 오언도 역시 정치를 했고 쓰라린 패배감을 맛보았죠. 오언이 우려한 정치는 ‘정치 과잉’일 것입니다.

정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제도권 정치에 대해 환멸감을 느끼면서도 근거 없는 새로운 정치를 열망하죠. 정치는 반응이기 때문에 반응할 건더기를 제시해야 작동합니다. 반응할 건더기가 없는 상태에서 정치의 바지끄덩이를 붙잡으려고 할 때 허무한 결과를 받아들게 됩니다.

차라리 자신의 욕구와 불만을 표현하고 공감하는 사람들을 조직해서 여기에 반응하고 화답하는 정치 세력을 찾는 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듯, 어리석은 사람들은 정치인들의 ‘반응’을 ‘표현’으로 오해합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정치인들도 자신들의 주제를 오해하여 ‘길’을 제시하려고 듭니다. 이것은 명백히 후진적인 정치 문화의 일면입니다.

많은 정치적 사건 덕분에 전 국민의 정치 이해도가 높아졌다고 하지만 정치를 제대로 쓸 만한 이해 수준은 아닙니다. 정치를 말에 비유한다면, 말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크게 다칠 수 있죠. 아니면 체험 코너에서 몇 푼 내고 1~2분 정도 타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어쭙잖게 도전하다가 말 뒷발에 채이면 약도 없습니다. 정치는 천리마 타기보다 위험한 일이라는 점을 오언은 경고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2017. 05. 08    

오마이뉴스(시민기자) | 오승주 (dajak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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