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문재인 정부의 동아시아 구상은 어디로?

 

 

 | 문재인 정부의 동아시아 구상은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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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태인 (칼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소장)

 

촛불이 대통령을 바꿨다. 박근혜 씨의 탄핵 결정이 첫 번째 고비였다면 이제 막 두 번째 고비를 넘었다. 촛불은 세계의 희망이다. 신자유주의 시대라는 구체제가 확실히 막을 내렸지만 새로운 시대는 아직 열리지 않았다. 세계는 포퓰리즘의 시대다. 과연 문재인 대통령은 “새 시대의 첫차이고 싶었는데 구시대의 막차”였다고 한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넘어설 수 있을까?

선거가 시작될 무렵, 경제도 위기, 안보도 위기였다. 새로운 대통령을 축하라도 하듯, 다행히 양쪽 모두에 숨구멍이 트였다. 주로 반도체 가격 상승에 힘입어 수출이 12개월째 호조를 보였고, 사드 보복에도 불구하고 대중 수출도 꾸준히 늘고 있다. 안보 쪽도 미국과 중국이 “최대의 압박, 그리고 관여”, 즉 대북 협상 쪽으로 방향을 잡은 듯하다. 4월의 살 떨리는 위기는 일단 지나갔다.

대통령의 제1호 업무지시는 “일자리 위원회 설치 및 운영”이다. 만일 “소득주도성장”을 정책 기조로 한 것이라면 시의적절하다. 현재 경제위기의 원인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심화하고 있는 불평등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앞으로 임명될 경제사령탑이 이러한 철학을 지니고 있는가가 관건이다.

그럼 안보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까? 2003년 이맘때 나는 “동북아 비서관”으로 임명됐다. “동북아 위원회”(처음에는 “동북아 경제 중심 추진위원회”, 이후 “동북아 시대 위원회”로 개명)를 대통령의 뜻대로 운영하는 임무를 맡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거창한 구상은 있었으되 전략과 전술, 모두 없었다. 금융산업과 물류 산업 육성이나 남북철도연결, 전략 클러스터 구상 등 핵심 사업을 기획했지만, 이 모두를 잇는 굵은 기조도 없었고 막상 같이 논의해야 할 중국이나 일본과의 외교 통로조차 확보하지 못했다. 구호는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였지만 평화(안보)와 번영(경제) 간의 관계, 상호 작용, 발전의 메커니즘을 밝히지도 못했다.

 

MAD와 MAED

북한의 핵전략은 정확히 상호확증파괴(MAD, Mutual Assured Destruction)를 따르고 있다. 냉전 시대 강대국의 행동 원리를 이론화한 미어샤이머(John Mearsheimer) 부류의 공격적 현실주의나, 셸링의 게임이론은 오히려 북한의 행동을 정확히 설명해 준다. 국가의 안보를 확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상대국을 일거에 궤멸시키거나 엄청난 인명 살상을 할 수 있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이를 상대국에 도달시켜주는 전달체계(ICBM, SLBM, 전략 폭격기 등)를 갖추는 것이다. 양국이 모두 이런 무기체계를 지니고 있다면 서로 두려워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공포의 균형) 

아무리 안보가 중요하더라도 다른 목표, 예컨대 국민의 생활의 질 향상을 목표로 삼고 또한 정치가 존재한다면 어떤 국가도 정확히 공격적 현실주의에 따라 행동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북한은 당 안에 모든 정치 행위를(심지어 경제도) 흡수했고, 또한 주체사상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거의 완벽하게 이런 통제시스템을 합리화하고 있다. 해서 러시아 출신 랑코프(Lankov,A) 교수(국민대)가 한탄한 대로 “초 합리주의”적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 오로지 김정은 정권의 유지가 단일한 목표이기 때문에 북한의 행동은 게임이론의 예측대로 초 합리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는 왜 훨씬 더 숫자도 많고 강력한 중국의 핵무기는 걱정하지 않는 것일까? 미국의 핵무기는? 그들이 우리를 공격할 이유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국제규범이나 경제적 이해관계, 국내 정치 등이 관련되어 있다. 이런 사고를 경제 쪽으로 단순화하면 페리 전국방관이 주창하는 “상호확증 경제파괴(Mutual Assured Economic Destruction)”이 된다. 즉 경제적인 연관이 두터워져 잃어버릴 게 많아지면 서로 공격하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북한의 초 합리적 정권 안보 전략은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있다. 국제관계의 최소화가 그것이다. 이제 정보나 기술의 교류가 아니라 차단이 목표가 되고, 이에 따라 북한의 기술, 경제, 사회, 문화에는 뚜렷하게 잠김 현상(lock-in)이 나타나고 있다. 김일성-김정일주의라는 웅덩이에 사회가 갇혀 썩어가는 셈이다(물론 정권의 통제를 넘어 민간의 비공식적, 회색시장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기도 하다).

 

북핵문제 해결의 입구와 출구, 그리고 그 너머

그동안의 역사를 보나, 북한의 요구를 보나 북핵 문제 해결의 입구는 한미 군사훈련의 중단과 북핵 동결의 교환이다. 출구는 일단 한반도 비핵화일 텐데, 그 조건은 평화협정 등의 체결 때문에 북한이 안보 위험을 걱정하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여기까지 어떻게 이를 것인가? 

먼저 확인해 둘 것은 문재인 정부가 이 과정을 주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9년 동안 우리는 한반도 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한반도 평화의 모범적 사례로 일컫는 ‘페리 프로세스’는 기실 ‘임동원 프로세스’였다. 하지만 이제 그 내용은 한 층 더 발전해야 한다. 원칙부터 말하자면 일단 입구에 들어선 뒤엔 “최대의 압박, 그리고 관여”가 아니라 “최대의 혜택, 그리고 관여”여야 한다. 그리고 그 혜택은 국제적이어야 한다. 북핵 위기가 재연되지 못 하게 하는 것은 국제관계의 과실이지, 경제제재가 아니다. 말하자면 국제판 햇볕정책이다. 

입구에 이르는 첫 단추는 사드 배치의 철회, 또는 축소(북한지역만 감시하는 레이더로 교체)이다. 처음부터 사드 문제는 협상의 여지가 넓었는데, 트럼프 정부의 대북한 전략이 결국 관여, 즉 협상으로 결정되었으므로 훨씬 더 다루기 쉬워졌다. 트럼프 대통령의 목표는 가능한 이른 시점에 협상을 시작해서 미국 내외의 각종 비판을 잠재우는 것이고 사드 배치는 오바마 정부의 결정이다. 트럼프에게 사드는 협상의 지렛대이지 목표가 아니다.

사드 배치의 철회나 축소는 중국엔 크나큰 선물이다. 중미 간 MAD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중국은 그 비용을 기꺼이 치르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중국과 북한에 줄 “최대의 혜택”에 관해 협상할 수 있다. 바로 AIIB(Asian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를 활용하여 북한의 철도와 도로망을 현대화하고, 나아가 송유관과 가스관, 그리고 통신망을 까는 것이다. 북한은 AIIB의 가입을 원했지만, 중국이 이를 거부했다. 물론 현재 상태에서 북한은 어떠한 국제기구에도 가입할 수 없지만, 중국과 한국, 러시아와 아세안 국가들이 합의한다면 AIIB에 가입할 수 있다. 북한의 국제관계가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다. 북한이 내내 고립주의를 택했던 것은 아니다. 70년대 말, 80년대 말에는 상당히 적극적으로 국제관계의 복원에 나섰다. 하지만 때가 지독히도 안 좋았다. 석유 위기와 사회주의의 몰락이 이 전략을 뒤덮어 버렸다. 

이번엔 다르다. 트럼프도 북핵 해결의 비용을 AIIB가 대는 것이니 반대할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도 한국 내부의 ‘퍼주기’라는 비판도 설 자리가 없어진다.

 AIIB 가입과 북한 인프라 개발에 따른 북핵 해체의 진행 정도에 맞춰 북일관 계 정상화와 경협자금(전쟁배상금)도 동원할 수 있다. 비핵화의 출구에는 북미 관계의 정상화가 있을 테고, 이후에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과 아시아개발은행(ADB)의 지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북핵을 돌이킬 수 없게 하는 것은 압박이 아니라 경제적 혜택을 넘어서는 국제관계다. 현재 북한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시장이 국제적 관계를 맺게 되면 다시 고립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해진다.

 

 

한반도 비핵화 너머..

비핵화라는 출구는 북한의 처지에서 보면 여전히 위험한 상황이다. 핵 폐기의 전범으로 꼽는 ‘우크라이나 해법’도 주변 강대국의 보장에도 불구하고 20년 뒤, 러시아의 침공으로 귀결되었다. 전통 무기의 심각한 불균형은 북한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MAED가 실현되려면 조금 더 믿음직한 동아시아 체제가 필요하다.

남한이나 북한, 모두 중국과 미국 사이에 끼어 있다. 동맹 외교는 강대국의 이익에 연루되거나(사드가 그렇다) 반대로 방치됨으로써(애치슨 라인이 그랬다) 종종 약소국을 위험에 빠뜨린다. 즉 남한과 북한의 외교는 강대국과의 동맹에 안보를 의존하는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와 처지가 비슷한 나라들의 행동에 주목해야 하는데 동아시아에서는 아세안을 주목해야 한다. 일부는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지만, 경제적으로 한국에 뒤처진 나라들이 지난 30여 년 간 이 지역 외교를 주도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돌이켜 보면 냉전 시대의 “제3세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국과 미국이 이들 나라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완충지대에 구애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비중-비미의 제3지대가 필요하며 적어도 이런 체제가 갖춰져야 북한도 MAD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진정으로 한반도의 통일을 원한다면 현재의 남한과 북한체제 중 양자택일하는 건 불가능하다. 만일 양쪽이 모두 원하는 사회경제체제가 있다면, 그리고 양 국민이 그 방향에 합의할 수 있다면 각각 사회를 그쪽으로 개혁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김정일위원장은 스웨덴과 싱가포르에 관심을 보인 바 있다. 그렇다면 남북이 모두 북유럽 복지국가 체제로 나아가는 데 합의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북유럽 체제로 가는 데 어느 쪽이 더 쉬울지 단언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어느 시점에 체제도 비슷해지고 경제적 격차도 훨씬 줄어든다면 비로소 편하게 통일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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