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인의 경제시평]유능제강(柔能制剛)

 
[정태인의 경제시평] 유능제강(柔能制剛)
 
 
벌써 10년째 열리지 않고 있는 6자회담이 재개된다고 상상해 보자.
이왕 상상의 나래를 편 김에 6개국 정상이 한자리에 모인 그림까지 떠올려 보자.

 
[정태인의 경제시평]유능제강(柔能制剛)

문재인, 김정은, 트럼프, 시진핑, 아베, 푸틴. “아이고, 우리 ‘이니’ 어떻게 해?”라는 탄식이 나올 법하지 않은가? 남북 정상을 빼곤 하나같이 근육질이다. 북한 역시 핵으로 “벼랑 끝 전술”을 펼치는, 말 그대로 폭탄이니 만만한 상대가 없다.

북핵 문제는 북한의 의도대로 여지없는 북·미 문제가 되었다. 전임 정부가 덜컥 결정하고 문재인 정부가 사실상 추인한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는 미·중 갈등을 한반도로 끌고 왔다.

만일 사드가 미국의 아시아 미사일 방어망의 일부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지 못한다면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신냉전 구도도 이제 ‘기우’ 차원을 벗어난 일이 된다. 한반도는 아시아의 발칸반도가 될 수 있다. 열전은 아니더라도, 월러스틴이 예언한 대로 동북아 모든 국가가 핵무기를 가지고 군비경쟁을 벌이는 살얼음판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명청 교체기의 인조와 사대부 집단, 구한말의 고종과 지식인 집단의 무능을 한탄하지만 지금이 바로 그렇다.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국내 개혁을 한 발 한 발 진전시키고 있는 문 대통령의 이미지에 인조와 고종의 우유부단이 얹힌다면 그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중국 한고조 유방의 명장 장량에게는 황석공이라는 숨은 참모가 있었다. 그가 전해준 비결에는 노자의 도덕경에서 따온 “유능제강 약능승강(柔能制剛 弱能勝强)”이라는 어구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유와 약인 건 확실하고 능히 강을 제압하고 이길 수 있다는데 그 수는 무엇일까?

 

먼저 해야 할 일은 기정의 사실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강자들이 원하는 대로 휘둘리기 시작하면 그때마다 반대쪽에서 얻어맞을 것이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까지나 캐스팅보터의 위치다. 즉 강자들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용해야 한다. 나아가서 캐스팅보터들의 집단을 만들어내서 안정적 균형으로 바꿔 나가야 한다. 

한국은 미국의 대중 전선과 중국의 대미 전선 양쪽 취약고리에 속한다. 어느 쪽도 한국이 상대 쪽으로 완전히 넘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사드 배치는 중국의 눈에는 한국이 대중 전선의 첨병이 되겠다는 신호일 테다. 트럼프가 원하는 대로 사드 값을 치러서 우리 군이 운용하거나, 북핵 협상이 시작되면 사드의 전원을 끄겠다는 약속을 미국한테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최선은 사드를 미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일 테지만, 어떻든 현재와 같은 사드 배치와 운용을 기정사실로 만들면 안된다. 지금은 최종재의 대중 수출만 감소하고 있지만 폭발적 반도체 호황이 꺾이면, 그러니까 1~2년 뒤에는 중국 요인이 GDP를 1% 이상 떨어뜨릴 것이다. 

시간은 중국 편이지만 미·중의 힘겨루기는 몇 십년간 계속될 것이다. 똑같은 앵글로색슨 국가들인 영국과 미국도 헤게모니 교체에 80년 이상 걸렸다는 점을 상기하자. 언제까지 외줄타기를 하면서 시간만 끌 수는 없다. 사드의 환경영향평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영향 평가가 바로 전형적인 시간 끌기다. 요행은 없고 사태는 악화된다. 미국의 방치도 문제지만 중국의 절연은 더 큰 문제를 일으킬 테고 북핵 문제의 해결은 그만큼 멀어진다. 

우리와 같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나라는 없을까? 눈을 뜨기만 해도 미국과 중국을 뺀 동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보일 것이다. 자본주의 황금기였던 전후 30년은 제3세계의 황금기이기도 했다. 미국과 소련이 서로 구애 경쟁을 벌였을 때 이 나라들은 매년 평균 6%의 성장을 했다.

동아시아에 이런 구도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한국의 기본 전략이 되어야 한다. 정부는 경제의 눈으로 아세안과 인도의 중요성을 바라보고 있지만 안보의 눈으로 봐도 마찬가지다. 아세안은 헤게모니 국가가 없는 집단안보체제(아차랴 교수의 “합의 안보질서”)를 수십년간 운용해 왔다. 한국이 여기에 참여한다면 이들 국가에는 천군만마와도 같을 것이다. 비동맹 노선을 외로이 고수하고 있는 북한도 들어오고 싶을 것이다. 

중국과 미국 사이의 ‘제3지대’는 두 강대국의 갈등을 조정하는 충격 흡수판이 될 테니 두 나라도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일본도 홀로 중국과 맞서는 것이 버거워질 때 결국 이 길로 올 것이다. 문 대통령이 근육질 속의 유일한 외유내강이었다는 사실도 증명될 것이다. 물론 또 다른 유능제강의 길도 있을 것이다. 여야, 진보·보수 할 것 없이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길을 찾을 때다. 

 

 
2017. 08. 21 

정태인 | 칼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장
 
 

원문보기_경향신문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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