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싹쓸이’와 의회개혁

 

[세상읽기]‘싹쓸이’와 의회개혁

 

홍기빈 연구위원장님시민혁명 이후의 의회는 단일한 집단이 아니었다. 이념적으로나 물적 이해로나 서로 못 잡아 먹어 안달인 앙숙들이 오월동주하는 장이었다. 그래도 큰 의미가 있었다. 그전까지는 창과 칼을 들고 내란을 일으켜 온 나라를 피바다로 만들기 일쑤이던 이 원수들이 최소한 ‘칼이 닿지 않는 거리’(영국 의회)에서 소리와 침만 주고받으며 싸우게 되었으니까.

그리하여 의회라는 장은 사회에 내재하는 여러 갈등이 서로 적나라하고 격렬하게 드러나고 충돌하는 것을 스스로의 기능으로 삼는 장이 되었다. 싸우다가 결판을 내기 위해서는 ‘총알(bullet)’ 대신 ‘투표(ballot)’를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의회에서 허구한 날 싸움박질이나 벌이는 것이 꼭 나쁜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사회 안에 내재한 갈등과 충돌을 통제가능한 방식으로 드러내어 사회의 파괴를 미연에 방지하는 순기능을 수행 중인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전통사회에서 발원한 제도가 산업사회에서도 유지·온존될 뿐만 아니라 여전히 중심적인 권력기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데에서 생겨난다. 200년 전에 이미 생시몽이 누누이 이야기한 바 있듯이, 산업사회는 과학과 효율성과 인간의 자유 및 평등을 원리로 새로이 구성되는 사회이며 또한 기술 변화 등으로 항상 변화하고 재구성되는 역동적인 사회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여러 권력 집단들의 이권과 지배를 보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봉건 세대의 ‘권력 정치’가 소멸하고 산업가, 과학자, 노동자들 등 실제로 산업을 조직하는 이들에 의한 ‘관리 경영’이 국가의 역할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고 그는 보았다.

멀리 갈 것 없이, 2010년 이후의 대한민국이라는 산업사회도 기술과 산업으로부터 복지와 교육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대단히 급격하고 근본적인 변화들을 겪고 있다. 공무원 관료들과 그와 함께하는 여러 ‘거버넌스’의 기구들이 이러한 변화들에 대응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하고 있지만, 법치국가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법률이 개정되거나 있는 법률이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주지 않는 한 이러한 노력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의회는 그야말로 전통적인 의회 기능의 절정에 도달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혹은 세) 집단은 웬만해서는 서로 합의하는 법이 없고, 야당은 집권 여당을 ‘좌파 불온 세력’이라고 하며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그 결과 수없이 많은 절실한 법안들이 계류 중이다가 폐기되고 만다. 어느 한쪽도 다른 한쪽을 완전히 압도할 숫자와 힘이 없으니 결국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는 기능만을 빼어나게 수행할 뿐이다.

결국 현재의 한국 의회는 생시몽이 이야기한 종류의 산업사회의 국가 관리를 발목 잡고 사보타주를 하여 온 사회를 외통수로 끌고 가는 병목이 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특히 현재의 집권세력 일각에서는 이러한 정체 상태를 뚫기 위해서는 결국 야당을 완전히 압도할 만한 의석수를 다음 총선에서 확보하는 수밖에 없고, 그때까지 모든 정치 전략의 계획을 그 목적에 맞추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듯하다. 빗나간 생각이다. 그런 일이 과연 예측한 대로 가능할지도 의문이지만, 그렇게 압도적 다수가 일사천리로 법안을 통과시키는 일이 가능해진다고 해서 후유증이 없을지도 의문이며 또 과연 이것이 민주사회에서 의회가 맡아야 할 올바른 존재와 기능인가라는 문제도 생긴다. 현존하는 의회에서 승기를 잡아 문제를 풀겠다는 생각보다는, 이 낡은 틀의 의회 자체를 21세기 산업사회에 맞도록 업데이트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푸는 것이 옳다. 그리고 현재의 개헌 논의가 그러한 목적에 활용되어야 한다.

이는 20세기 들어 선진국 어느 나라나 겪어왔던 정치개혁의 과정이다. 아예 그 말썽꾸러기 국회의원들에게 국정운영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100% 정당 투표를 통해 전원 비례대표로 의회를 구성할 수도 있다. 지역구의 구획과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 지역색을 탈각시키는 방법도 있다. ‘4차 산업혁명’에 절실한 것은 블록체인 기술만이 아니라, 그에 걸맞은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의회 시스템을 구비하는 것도 들어간다. 답은 기존 의회의 ‘싹쓸이’가 아니다. 21세기형 의회의 창조이다. 역설적으로, 이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지지가 쏟아져서 오히려 ‘싹쓸이’가 가능할 수도 있다.

 

2018. 2. 2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원문보기_경향신문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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