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내 새끼’냐 ‘우리 새끼들’이냐

 

 ‘내 새끼’냐 ‘우리 새끼들’이냐

 

인간 사회의 경제에 있어서는 기계와 도구를 제작하고 조작하는 물질적 기술만큼이나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동원하고 조직하는 사회적 기술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사회적 기술에 반드시 포함되어 있는 것은, 불평등할 수밖에 없는 역할과 자원의 배분을 사회 성원들이 그럭저럭 납득하고 수긍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장치이다.

[세상읽기]‘내 새끼’냐 ‘우리 새끼들’이냐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거의 절대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해 온 장치는 바로 교육이다. 훌륭한 인재를 배출하여 높이 쓴다는말은 곧 훌륭하지 않은 인재를 갈라내어 배제하고 천대한다는 말과 동전의 양면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짧은 교육과 지적 능력을 탓하면서 그러한 불평등한 역할 배분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이러한 논리 자체는 어디까지나 사회 내에서의 위계 서열을 정당화하는 사회적 기술일 뿐 산업적 효율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이다. 시문을 잘 짓는 진사나리가 훌륭한 행정 관료가 되라는 법은 전혀 없다. 대학에서 플라톤을 읽는다고 훌륭한 회사원이 되는 것도 아니다.

반세기 만에 고도의 산업국가로 압축성장해 온 한국 자본주의에서 교육은 바로 이렇게 일 시킬 사람과 일할 사람을 불평 없이 갈라내는 위계적인 사회적 기술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했다. 세계 최고라고 하는 대학 진학률 로 나타나는 한국의 교육열은 우리가 유난히 지덕체를 고루 갖춘 인격체 를 사랑하는 고상한 민족이어서가 아니라 사회 체제가 이렇게 가방끈이 짧으면 사람 취급을 못 받도록 되어 있다는 고도 성장기의 뼈아픈 기억이 낳은 과잉경쟁의 결과물에 더 가까울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국·영·수가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국·영·수가 2차 산업혁명 시대의 굴뚝 공장 경영과는 무슨 관계가 있었던가? 국·영·수의 중요성은 산업의 효율성이 아니라 바로 이렇게 학생들을 1등에서 꼴등까지 줄 세우는 가장 ‘변별력 좋은’ 장치였기 때문에 중요해진 것이 아니었던가?

문제는 그 ‘4차 산업혁명’이라는 것이 이러한 역할 분담의 불평등을 훨씬 극단적으로 만들 것이라는 염려에 있다. 인공지능과 로봇을 비롯한 여러 기술혁신은 이미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인간의 일자리라는 것을 지극히 불평등하게 양극화시키고 있다. 고액 연봉과 여유 있는 삶이 주어지는 초고숙련 전문 기능인들은 극소수이며, 압도적 대다수에게는 언제 잘릴지 모르는 월급 150만원짜리 일자리만 양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가뜩이나 교육이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는 장치로 위력을 휘둘러온 대한민국에서는 이러한 미래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가 자식들에 대한 더 많은 교육경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현존하는 교육 체제가 이렇게 사람을 위아래로 나누는 장치의 성격을 본질적인 특징으로 삼는다는 불편한 진실을 직시한다면, 피하지 말고 먼저 풀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산업 구조 또한 사회 성원들의 불평등한 위계제를 원칙으로 조직할 것인가? 그리고 그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기제로서 교육을 계속 사용할 것인가? 만약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 어떤 제도와 개혁을 도입한다고 해도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아귀다툼은 끊이지 않을 것이고 거기에서 배제된 대다수의 인재들에게 교육이란 그저 수재들의 들러리나 서주는 무의미한 시간 낭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산업사회는 모든 성원들이 지위에 있어서나 역량에 있어서나 최대한의 평등을 공유하고 있어야만 더욱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믿음 아래에 소수의 엘리트를 갈라내는 것이 아니라 뒤처지는 학생이 없도록 하여 모두가 똑똑해지는 것을 원칙으로 교육을 조직할 수도 있으며, 이것이 바로 핀란드 교육이 보여주는 바이다.

이것이 우리의 교육 제도가 끝없는 논쟁과 분란의 원천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의 아이들이 고르게 더 현명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교육에 대해서는 성원들 전체가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무조건 내 새끼가 남의 새끼보다 잘되는 교육 제도는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싸움밖에 벌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어느 쪽이 현명한 미래의 선택인지는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다.

이 시대는 승자독식의 시대이지 1명의 천재가 1만명을 먹여 살리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패배한 이들은 갈수록 더 무참히 짓밟히는 잔인한 산업사회가 다가오고 있다면, 우리의 선택은 무엇인가? ‘내 새끼’냐, ‘우리 새끼’냐 그것이 문제이다.

 

2018. 04. 06.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원문보기_경향신문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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