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1인 가구 시대 ‘좋은 삶’이란

1인 가구 시대 ‘좋은 삶’이란

[세상읽기]1인 가구 시대 ‘좋은 삶’이란사회변화의 속도에서 한국을 능가할 나라가 몇이나 있을까. 반세기 전만 해도 확대가족 위주의 사회였던 대한민국은 지금 1인 가구가 대세이다. 1인 가구의 비중은 이미 인구의 30%에 육박하고 있으며, 40대 이하에서는 절반을 넘었고, 2035년에는 인구의 40%에 달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한다. 이미 여기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시장 혹은 소비의 패턴을 파악하여 이를 노다지로 삼으려고 하는 이들은 여기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그래서 그 충격은 금융, 소비, 오락, 문화, 주거 등 사회의 모든 측면에 걸쳐서 벌써 우리 삶에 그 충격을 가하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인구학적 변화가 사회적 변화뿐만 아니라 결국 대한민국의 국가 형태와 자본주의 형태까지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것도 필연적인 일이다. 장황히 늘어놓을 수 없지만, 역사적으로 조망해 볼 때 1인 가구라는 것은 근대국가·자본주의가 낳은 특수한 산물이다. 민달팽이는 살 수 있어도 집단 없는 개인은 한순간도 살 수가 없다. 오로지 삶 전체의 안전을 담보해주는 근대국가 그리고 화폐라는 비인격적 관계로 삶의 조달이 가능한 자본주의라는 환경에서만 서식할 수 있는 특수한 종의 생물이 1인 가구이다. 따라서 1인 가구가 늘어날수록 국가가 책임져야 할 삶의 영역은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고, 1인 가구들 상호 간의 불평등도 계속 커져가게 되어 있다. 노동력 재생산이 여의치 않아 잠재 성장률은 떨어지는 한편 부양해야 할 고령자는 늘어나게 되며, 이를 메꿀 외국인들의 유입은 무수히 많은 변화와 진통을 가져오게 되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20세기의 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시스템을 설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제일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1인 가구의 삶은 좋은 것인가? 좀 세련되게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삶’에 비추어 볼 때 1인 가구의 의미와 위치는 어떤 것인가? 나 스스로도 몰라서 던지는 질문이며, 정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여 던지는 질문이다. 1인 가구의 삶에 대한 만족도는 성별에 따라, 연령에 따라 모두 다르게 나타난다. 20대에는 1인 가구의 삶이 동경의 대상일 수 있겠으나 50대 이후의 남성들에게는 만족도가 현저히 떨어진다고 한다. 즉 1인 가구라는 삶의 방식에 대한 평가는 어느 한 시점에서의 만족도와 같은 것이 아니라 인생 주기 전체라는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 바, 이는 보다 폭넓은 사회적 토론과 관점을 필요로 한다.

개인 차원에서의 ‘좋은 삶’만이 문제가 아니다. 집단 차원에서의 ‘좋은 삶’으로 볼 때에는 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잠재 성장률의 하락은 보기에 따라서 반드시 막아야 할 끔찍한 재앙일 수도 있고, ‘탈성장 사회’의 도래와 함께 담담히 받아들여야 할 숙명일 수도 있다. 이는 극심한 고독과 사회적 소외의 증후로 보일 수도 있고, 또 산업사회의 변화가 필연적으로 가져올 탄력적인 삶의 방식으로 더 많은 자유와 가능성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 또한 개인적 차원에서 답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요, 또 무슨 전문가 따위가 권위있는 정답을 낼 수 있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다양한 시각과 관점에서 의견을 내는 이들의 이야기와 실제의 구체적 경험의 이야기들이 서로 긴밀히 맞물리면서 우리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맞추어 가야 할 문제이다.

여기에서 기계적인 미래학의 빈곤을 오래전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놓았던 지혜로 메꾸어야 할 필요를 절감하게 된다. ‘미래’라는 것은 기술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에, 무조건 절대적으로 순응해야 할 대상도 아니며 또 무조건 거부하거나 지연시켜야 할 대상도 아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나의 그리고 우리의 ‘좋은 삶’이란 무엇이냐를 놓고 함께 이야기하는 일이다. 이 질문에 혼자서 답할 수 있는 이는 신 아니면 동물일 뿐이다. 도대체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며, 타인의 존재와 의미는 무엇이며,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태고 이래로 수많은 성경현전에서 다루어진 문제이지만, 이 팍팍한 21세기의 산업사회를 외로운 늑대처럼 헤쳐나가는 우리들은 우리의 삶의 환경에 맞게 이 질문들을 새로이 꺼내들고 새로이 뜻을 맞추어 가야 한다. 그렇게 합의된 나와 우리의 ‘좋은 삶’이 좀 더 뚜렷해진다면, 우리는 좀 더 자신있게 능동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설계하고 구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밤, 아이와 처가 잠든 후 총각 때를 떠올리며 수입맥주 4개 마시면서 ‘혼술’이나 해 봐야겠다.

2017. 08. 11

홍기빈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연구위원장

원문보기_경향신문 오피니언

댓글 남기기